도지정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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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응인묘역
韓應寅墓域
한자이름, 종목 및 지정번호, 지정일, 소재지, 시대로 구성된 표입니다.
지정구분 도지정문화재
종목 및 지정번호 경기도기념물 제157호
명칭(한자) 한응인묘역 (韓應寅墓域)
유형분류 유적건조물
지 정 일 1995-08-07
소 재 지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 산86-6번지 지도로 보기
시 대 조선시대

한응인묘역(韓應寅墓域)은 경기도기념물 제157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 산86-6번지이다.

조선 선조(宣祖) 때에 문신으로 활약한 백졸재(百拙齋) 한응인(韓應寅, 1554~1614)을 모신 유택이다. 봉분은 단분으로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와의 합장묘이며, 장대석을 이용하여 2단으로 방형의 호석(護石)을 둘렸다. 봉분 앞에는 묘비 · 혼유석 · 상석 · 향로석이 가까이 모여 있고, 묘역 앞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1쌍씩 배열되어 있다. 1994년 묘역을 새로 정비하면서 묘비의 기대(基臺) 부분과 상석·향로석·계체석 등의 석물을 교체 설치하였다.
신도비(神道碑)는 묘역의 50m 우측 전방에 위치하는데 우진각 지붕형 가첨석(加添石), 비신(碑身), 기대(基臺)로 구성되어 있으며, 규모는 비신이 79×23×179cm, 가첨석이 143×95×58cm, 기대가 145×100×59cm이다. 비문은 김류(金瑬 : 1571~1648)가 찬(撰)하고 한인급(韓仁及 : 1583~1644)이 글을 썼으며, 김광현(金光炫 : 1584~1647)이 전액(篆額)을 써서 인조(仁祖) 20년(1642)에 건립한 것이다. 이 신도비의 양식적 특징은 가첨석의 하단부 건물에 기둥석부와 지붕사이에 있는 공포(貢包)의 형상을 조각해 놓음으로써 압박감을 덜어주어 안정감있게 보이도록 한 것이다.

한응인은 선조 9년(1576)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이듬해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에 뽑혔고, 이어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지평(持平)·정언(正言)·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등을 역임하였다. 선조 22년(1589) 정여립(鄭汝立 : 1546~1589)의 모반 사건을 적발하여, 그 공으로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오르고 승지(承旨)를 지냈으며 선조 23년(1590) 평난공신(平難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임진왜란(1592~1598) 때에 왕을 따라 평양으로 갔다가 制度도순찰사(諸道都巡察使)로 임진강 방어에 임하였으나 왜장 가토[加藤淸正]의 유인 작전에 속아 전군이 붕괴되었다. 이에 왕을 뒤따라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임명되었다. 요동에 건너가 원병의 급속한 출병을 요구하였고, 이여송(李如松)이 원군을 이끌고 오자 접반관(接伴官)으로 이여송을 맞이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조 · 호조 · 병조의 판서를 거쳐 선조 40년(1607) 우의정에 올랐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자료출처 : 안산시청 및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 경기도, 2005)

[문헌목록]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3)』
『안산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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