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발굴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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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적위치 : 여주시 점동면 원부리 41-1번지 일원
  • 시 대 :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 조사기관 : 경기문화재연구원
  • 조사연도 : 1999~2001
  • 유구내용 : 건물지, 탑지, 등

여주 원향사지는 중부내륙 고속도로 건설공사 구간에 포함되어 2차에 걸쳐 구제발굴조사 하여 금석문에서 이름만 전해오던 원향사의 실체을 확인하는 성과를 올렸다. 발굴조사에서 ‘元香寺瓦匠僧順文’명 기와가 출토됨에 따라 「寧越 興寧寺 澄曉大師塔碑」에 나오는 陰竹縣 元香寺가 본 유적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원향사지는 오갑산 북서쪽 기슭에 자리 잡은 통일신라기 사찰로 북쪽의 강금산과 너른 들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 앞으로는 남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남한강과 합류하는 청미천이 흐르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금당지, 추정 목탑지 등 21기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 8~9세기에 작은 규모의 초창 가람이 조성되어 9세기말 사자산문과 관련된 선종계 사찰로 존속되다가, 11세기에 들어서면서 호족세력의 후원으로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져 문지, 탑지, 불전지와 법당지, 회랑지 등을 건립하여 사원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12세기에 한 차례의 중창이 있었지만, 13세기에 이르러서는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초창기 가람은 1호 건물지를 중심으로 한 남동향의 가람 배치로 추정되는데, 1호 건물지는 정면 5칸, 측면 2칸이며 기단은 정면 23m, 측면 10m 규모이다. 이 건물지에서는 전형적인 신라 양식의 막새기와와 고식 기와, 귀면와, 연목와, 부연와 등이 출토되고 있어 상당히 화려하게 꾸며져 가람 배치의 중심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21호 건물지 역시 초창 당시로 추정된다.

중창 시의 가람은 초창기의 가람을 중심으로 사역을 확장하기에는 공간이 협소하여 가람의 좌향을 동북향으로 바꾸고 예배 및 수행 영역과 생활 영역 두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건물을 배치하는 등의 큰 변화를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많은 건물이 새로이 건립되었는데, 불전지로 추정되는 2호 건물지를 중심으로 목탑지로 추정되는 5호 건물지가 중심축선에 위치하고 그 주변에 다수의 건물을 배치하여 중심 영역을 구성하였다. 유물은 9~13세기대에 이르는 토기, 기와, 고려청자, 고려백자, 중국자기 등이 다량 출토되었는데 11~12세기대 유물이 집중되고, 중국에서 수입된 고급자기 다수 출토되는 점, 13세기대 유물이 소량이고 14세기 이후의 유물이 전혀 출토되지 않는다, 이러한 유물의 출토양상으로 볼 때 8세기 중반에 창건되어 11~12세기대에 사세가 최고조에 달하다가 13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에 폐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역 내에서는 소조나한유희좌상, 소조나한상, 소탑, 명문와, 고려청자 및 고려백자, 중국자기 등을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공양구, 장엄구, 의식구, 생활용구 등이 발굴되었고, 고려 전기에 주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탄생불과 청동범종이 발견매장문화재로 신고되었다.

2차례의 조사에서 가람 배치의 대략적인 양상은 파악되었으나 도로공사 구간에 한정한 구제발굴이라 실제 추정되는 사역의 절반밖에 조사하지 못해 원향사의 전모를 밝히지 못한 한계가 있다.

[참고문헌]
기전문화재연구원·한국도로공사, 2003, 『원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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