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지정 문화재

스크랩하기
인쇄하기
즐겨찾기
퍼가기
카카오톡으로 퍼가기 페이스북으로 퍼가기
고양 벽제관지
高陽 碧蹄館址
한자이름, 종목 및 지정번호, 지정일, 소재지, 시대로 구성된 표입니다.
지정구분 국가지정문화재
종목 및 지정번호 사적 제144호
명칭(한자) 고양 벽제관지 (高陽 碧蹄館址)
유형분류 유적건조물
지 정 일 1965-02-02
소 재 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관로 34-16 (고양동 55-1번지) 지도로 보기
시 대 조선시대

고양 벽제관지(高陽 碧蹄館址)는 사적 제144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관로 34-16이다.

이 자리는 옛 역관(驛館)이 있던 자리이다. 조선시대에 서울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관서로(關西路) 또는 의주로(義州路), 연행로(燕行路)에는 이와 같은 역관이 10여처에 있었다. 이곳에서는 주로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가는 사절이 숙박 휴식하였고, 특히 벽제관은 때로 국왕이 제릉(齊陵)에 제사를 지낼 때 숙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한편 중국에서 오는 사절들도 역관에 머물러 휴식하는 공용 숙박시설이라 하겠다. 더욱이 이들 역관은 역을 동반하고 있어서 교통, 통신의 편의를 최대한으로 이용할 수 있기도 했다.

더욱이 벽제관은 한양에 인접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 오는 사절들은 서울로 들어오기 하루 전에 반드시 이 역관에서 숙박하고 다음날 예의를 갖추어 서울로 들어가는 것이 정예로 되어 있었다.
본래 고양군의 옛 읍치(邑治)는 벽제관에서 북방으로 5리 정도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위치는 읍치를 옮긴 1625년(인조 3)에 이곳에 새로 세운 객관(客館)이었다. 그러나 그 후의 중건은 확실히 알 수 없으며 일제강점기 때 일부가 헐렸고 6․25 전쟁 때 전소되었다. 그러나 1960년경까지도 객관문은 남아 있었으나 퇴락하여 무너져버려 현재에는 관사(館舍)의 윤곽과 터전만이 남아있다.

이곳을 기점으로 북방으로 혜음령(惠陰領)과 동북방으로 있는 퇴패치(退敗峙 : 됫박고개), 그리고 서남으로 퍼져가는 도로를 이어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이여송(李如松) 장군과 왜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인 이른바 벽제관 싸움의 전장터 중심지가 되는 자리이기도 하며 이여송군이 혜음령에서 대패한 많은 뒷이야기를 남기고 있기도 하다.
벽제관은 관서로 연로에 설치한 첫 역관이었다는 점 외에 국왕이 중국사신을 친히 영송하던 모화관(慕華館)에 버금하는 의미를 지니고, 반드시 1일 전에 이곳에 유숙하고 서울에 들어가도록 한 객사(客舍) 자리라 할 수 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대관-사적편(개정판,下)』)

[문헌목록]
『경기문화재대관-국가지정편』
『(우리고장의)문화재총람-지정문화재편』
『(고양시)문화재대관』
※ 문화재를 보고 묘사하는 단어, 떠오르는 인상이나 느낌 등을 한 두 단어로 입력해보세요.
※ 여러분과 같거나 다른 생각들을 확인해보세요.
이전 다음 국가지정 문화재
공공누리 제4유형: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경기문화재단이 보유한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작품 사진의 경우 작품저작권자의 권리에 의해 보호를 받기 때문에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으니 문의 후 이용 바랍니다.

콘텐츠 정보에 만족하십니까?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