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지정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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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태고사 원증국사탑
高陽 太古寺 圓證國師塔
한자이름, 종목 및 지정번호, 지정일, 소재지, 시대로 구성된 표입니다.
지정구분 국가지정문화재
종목 및 지정번호 보물 제749호
명칭(한자) 고양 태고사 원증국사탑 (高陽 太古寺 圓證國師塔)
유형분류 유적건조물
지 정 일 1983-12-27
소 재 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서문길 197-20(북한동) 지도로 보기
시 대 고려시대

고양 태고사 원증국사탑(高陽 太古寺 圓證國師塔)은 보물 제749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서문길 197-20이다.

북한산 태고사의 북쪽 봉우리 중턱에 자리한 승탑으로, 중국 원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고려의 선종불교를 중흥시킨 원증국사(圓證國師)의 묘탑이다.
고려 말기에 세워진 이 탑은 넓은 축단(築壇)을 시설하고 그 중앙에 탑을 세웠는데, 두툼하고 널찍한 2벌의 지대석 위에 낮은 연화좌형 기단이 구성되고 그 위에 위가 좁아진 원구형 탑신이 놓였다. 지붕은 처마 끝이 두툼하고 상륜부는 묵직한 편구형 복발과 보개, 보륜, 수연, 보주 등으로 장식되었다. 기단부는 옆면에 3칸의 네모곽을 장식한 사각의 받침돌 위에 연꽃잎 무늬를 장식한 하대와 8각의 중대석, 그리고 연꽃잎 장식의 두툼한 8각 상대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부의 몸돌은 전체적으로 위아래가 납작한 원구형이지만 위로 갈수록 좁아진 형태를 하고 있다. 8각의 두툼한 옥개석에는 추녀 끝마다 귀꽃이 장식이 되어 있으며, 각 면의 처마에는 장막(帳幕)을 드리운 듯한 무늬를 새겨 넣어 독특한 장식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 위에는 두툼하고 납작한 보주를 놓고 보개와 불꽃에 싸인 보주를 얹어 상륜부를 이루었는데 보개의 형태는 옥개석과 비슷하다.

이 승탑은 현재 옥개석의 일부가 손상되었을 뿐 거의 완전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또한 고려시대 말기에 세워진 만큼 모든 부재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묵직하게 조성되고 선의 감각도 둔감하여 탑 전체에 새로운 중국식 석물조형기법이 적용된 흔적이 역력하다. 탑형은 전통형식으로 되어 있으되 탑신의 표면이 곡면화되어 종형 탑신처럼 처리되어 있다. 이러한 점은 이 시기에 들어 이 승탑의 탑신이 종형 탑신에서 파생된 점을 알 수 있게 해주며, 조선시대 승탑에서 자주 채택되는 편구형 탑신으로 진전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원증국사 탑비에 의하면 국사는 우왕 8년에 입적하였고, 11년에 탑비를 세웠다고 하였으므로 이 승탑은 적어도 고려 우왕 11년(1385)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로 지정될 당시 이 부도는 도굴 때문에 무너져 있어 원형을 알 수 없는 상태였으나, 1980년 10월 각 부재를 수습하여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자료출처: 『문화재대관(보물편·석조1,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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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문화재대관(보물편·석조2), 개정판』

원증국사(圓證國師, 1301~1382)

원증국사의 속성의 홍씨, 이름은 보우(普愚), 호는 태고(太古)이다. 1301년 충남 홍주(洪州)에서 탄생하였다. 13세에 출가하여 회암사(檜巖寺) 광지(廣智)의 제자가 되었고, 얼마 뒤 가지산(迦智山)으로 가서 수행하였다. 26세에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하고 그 뒤에도 불경을 열람하면서 깊이 연구하였다. 하지만 불경의 연구가 진정한 수행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참선에 몰두하였다.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중흥사(重興寺)에서 후학들을 지도하였고, 중흥사 동쪽에 태고암(太古庵)을 창건하여 5년동안 머물렀다. 이후 원에 유학하여 연경을 거쳐서 1347년 7월에 호주(湖州) 천호암(天湖庵)에서 석옥(石屋)을 만나 임제선(臨濟禪)을 공부하였다. 석옥으로부터 제자로 인정받고 1348년에 귀국하여 중흥사에 머물렀으며, 이후 미원의 소설산(小雪山)으로 들어가 임제선을 전파하였다.

1363년에는 신돈(辛旽)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왕사의 인장을 반납하고 전주 보광사(普光寺)에 가서 머물렀다. 1368년 여름 신돈이 공민왕에게 청하여 보우를 속리산에 유배시켰으나 이듬해 3월 풀려나 다시 소설산으로 돌아왔다. 1371년 우왕이 국사로 봉하였다. 보우는 고려 말 정치 부패, 불교계의 타락 등을 인식하고 이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서울을 한양으로 옮겨 정치와 불교를 혁신할 것을 주장하였다. 고려 후기에 여러 종파의 대립상을 극복하기 위하여 선종과 교종을 통합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382년 82세가 되는 해에 소설산으로 돌아왔다. 그해 12월 24일 새벽에 목욕한 후 옷을 갈아입고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다.
[문헌목록]
『(고양시)문화재대관』
『문화재안내문안집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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