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지정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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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장군묘
南怡將軍墓
한자이름, 종목 및 지정번호, 지정일, 소재지, 시대로 구성된 표입니다.
지정구분 도지정문화재
종목 및 지정번호 경기도기념물 제13호
명칭(한자) 남이장군묘 (南怡將軍墓)
유형분류 유적건조물
지 정 일 1973-07-10
소 재 지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산1 45 지도로 보기
시 대 조선시대

남이장군묘(南怡將軍墓)는 경기도기념물 제13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산145번지이다.

조선 전기의 무신인 남이(南怡, 1441~1468) 장군을 모신 유택이다. 2단으로 쌓은 석축대 위에 조성되어 있고 봉분은 사성(沙城)으로 둘러 싸였으며, 부인과의 합장묘인 쌍분이 호석(護石)으로 잘 단장되어 있다. 석물은 월두형(月頭形) 묘비, 상석과 문인석·망주석이 각 1쌍씩 조성되어 있다.

남이 장군은 세조(世祖) 3년(1457) 17세 때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세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여러 무직(武職)을 역임하였다. 이시애(李施愛 : ?~1467)의 반란(1467) 때 대장으로 출정한 그는 난을 토벌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여진의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할 때도 선봉으로 적진에 쳐들어가 이등군공(二等軍功)에 책록된 후 26세의 나이에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다.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유자광(柳子光 : ?~1512)의 무고(誣告)로 처형되니 28세였다. 이것을 소위 ‘남이의 옥(獄)’이라 한다. 장군이 궐 안에서 숙직 중 혜성이 나타나자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다”라고 말한 것을 유자광이 엿들었다. 유자광은 남이가 역모를 꾀한다고 모함하여, 문초 끝에 죽임을 당하게 하였다. 이 사건으로 임진왜란(1592~1598) 전까지 그는 난신(亂臣)으로 인식되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일부 야사(野史)에서는 유자광의 모함으로 날조된 옥사라고 규정하고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죽은 영웅적 인물로 기술하고 있다. 그 뒤 순조(純祖) 18년(1818)에 이르러 남이의 후손인 우의정 남공철(南公轍 : 1760~1840)의 주청으로 관직과 작위가 복구되었다.

(자료출처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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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홈페이지)

남이(南怡)

생몰연대: 1441(세종 23)∼1468(예종 즉위년). 본관은 의령(宜寧). 할아버지는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재(在)이고, 아버지는 의산군(宜山君)휘(暉), 어머니는 정선공주(貞善公主 : 태종의 4녀)이다.
1457년(세조 3)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세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여러 무직을 역임했으며, 1466년 다시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했다.
1467년 명을 받아 포천(抱川)·영평(永平) 등지에서 도적을 토벌했고,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키자 대장(大將)이 되어 구성군준(龜城君浚)·조석문(曺錫文)·허종(許琮)·강순(康純)·어유소(魚有沼) 등과 토벌에 참가했으며, 군중에서 당상관에 초계(超階)되어 행부호군(行副護軍)을 거쳐 행호군이 되었다.

이시애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책록되고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졌다. 이어 서북변(西北邊)의 건주위(建州衛) 여진을 토벌하자 평안도선위사(平安道宣慰使) 윤필상(尹弼商)의 지휘 하에 우상대장(右廂大將)이 되어 주장(主將) 강순, 좌상대장(左廂大將) 어유소와 함께 만포(滿浦)로부터 파저강(波猪江)을 공격해 이만주(李滿住)를 참살했다.
이러한 공로로 이등군공(二等軍功)을 받았으며, 그 뒤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468년에는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겸했으며, 이어 병조판서에 발탁됐다.

그러나 그 해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 등 원상(院相) 세력에 의해 구성군·강순 등 이시애의 난 평정으로 등장한 신세력이 제거될 때 형조판서 강희맹(姜希孟)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한계희(韓繼禧)에게 남이의 사람됨이 군사를 장악하기에는 마땅치 않다고 말한 것을, 한계희가 예종에게 아룀으로써 병조판서에서 해직되어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밀려났다.
이 때 그가 궁궐 안에서 숙직을 하고 있던 중 혜성(彗星)이 나타나자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다.”라고 말했는데, 이를 엿들은 병조참지(兵曹參知) 유자광(柳子光)이 역모를 꾀한다고 모함함으로써 국문 끝에 능지처사당했다.

그 뒤 1818년(순조 18) 우의정 남공철(南公轍)의 주청으로 강순과 함께 관작이 복구되었다. 어릴 때 권람(權擥)의 딸이 귀신의 작란(作亂)으로 죽게 된 권람(權擥)의 딸을 살려준 것이 인연이 되어 아내로 맞았다는 설화가 있다.
창녕의 구봉서원(龜峯書院), 서울 용산의 용문사(龍門祠) 및 서울 성동의 충민사(忠愍祠)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문헌목록]
『문화재 안내문안집. 2』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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