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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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정
伴鷗亭
한자이름, 종목 및 지정번호, 지정일, 소재지, 시대로 구성된 표입니다.
지정구분 도지정문화재
종목 및 지정번호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2호
명칭(한자) 반구정 (伴鷗亭)
유형분류 유적건조물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반구정로 53-85 지도로 보기
시 대 조선시대

반구정(伴鷗亭)은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2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반구정로 53-85이다.

반구정은 조선 세종 때 유명한 정승이었던 황희(1363∼1452)가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친구 삼아 여생을 보내시던 곳이다. 황희 선생은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에 걸쳐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문물과 제도의 정비에 노력했으며, 세종(재위 1418∼1450)대에는 20여년 동안 국정을 총리하는 의정부(議政府)의 최고 관직인 영의정부사로서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4군 6진의개척,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하여 세종성세를 이루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그는 청백리의 삶을 통해 많은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문종 2년(1452) 황희가 89세로 세상을 떠나자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반구정은 임진강 기슭에 세운 정자로 낙하진과 가깝게 있어 원래는 낙하정(洛河亭)이라 불렀다. 맑은 날 정자에 오르면 멀리 개성의 송악산을 볼 수 있다. 미수 허목선생이 지은 《반구정기(伴鷗亭記)》를 보면 ‘정자는 파주 서쪽 15리 임진강 아래에 있고 조수 때마다 백구가 강 위로 모여들어 들판 모래사장에 가득하다. 9월이면 갈매기가 손으로 온다. 서쪽으로 바다는 30리다.’라고 아름다운 풍광을 묘사해 놓았다. 반구정이 위치한 곳 좌측의 높은 대지에 앙지대가 있으며 반구정 아래에는 황희선생 영당 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황희가 죽은 후 조상을 추모하는 전국의 선비들이 유적지로 보호하여 오다가 한국전쟁 때 모두 불타 버렸다. 그 뒤 이 근처의 후손들이 부분적으로 복구해 오다가 1967년 시멘트로 개축을 하고 1975년에 단청과 축대를 보수하였다. 그 후 1998년 유적지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반구정과 앙지대등을 목조건물로 개축하였다. 건물 규모는 앞면 2칸, 옆면 2칸의 장방형 평면에 초익공 형식의 공포 구성으로 기둥 윗부분과 옆면 등에 꽃무늬 장식을 돌려 붙였다. 내부에는 『반구정중수기(伴鷗亭重修記)』와 『반구정기(伴鷗亭記)』 그리고 한글로 옮겨진 <반구정 중건에 붙이는 글> 등 여러 개의 편액이 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파주시청 / 경기문화포털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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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경기문화포털

황희 정승의 업적과 관련유적은?

조선시대 청백리의 표상 황희

조선시대 청백리에 녹선된 인물은 모두 217명에 달하는데, 그 중에서도 청백리의 표상으로 여겨지는 이는 단연 황희(黃喜)이다. 청빈한 관직생활과 자상한 인품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채 90평생을 살다간 황희 정승은 고려 말인 1363년(공민왕 12) 개성 가조리(可助里)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용궁 김씨(龍宮金氏)가 그를 잉태했던 열 달 동안 송악산 용암폭포에 물이 흐르지 않다가 황희가 태어나자 비로소 전과 같이 물이 쏟아져 내렸다고 전해진다.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였으며 본관은 장수(長水), 호는 방촌이다. 아버지는 판 강릉대도호부사를 지낸 황군서(黃君瑞)이다. 1376년(우왕 2) 음덕으로 복안궁녹사(福安宮綠事)에 임명되어 처음 관직에 나간 후 1389년(창왕 1) 별장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적성현 훈도로 부임한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다가 1394년(태조 3) 성균관학관으로 등용되어 세자우정자를 겸임한 후 직예문춘 추관, 사헌부감찰을 지냈다. 태종대에 이르러 각별한 신임을 받는데, 태종은 “이 일은 나와 경만이 알고 있으니 만약 일이 누설된다면 경이 아니면 내입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오.”라며 늘 황희를 불러 국사를 의논하곤 하였다. 1409년(태종 9) 12월 형조판서에 임명되는 것을 시작으로 판서 반열에 오르는데 병조판서·예조판서·이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세종이 등극하자 황희는 1423년(세종 5) 5월 예조판서에 이어 7월 기근이 만연한 강원도에 관찰사로 파견되어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1426년 2월 다시 이조판서를 거쳐 그 해 5월 우의정으로 승진되었고 1427년 1월 좌의정에 오른다. 그리고 1431년 9월 영의정에 오른 후 1449년 10월 관직을 떠날 때까지 19년간 영의정으로 재임하면서 세종성세에 커다란 업적을 세우게 된다.

황희는 태종과 세종이 가장 신임했던 재상으로 당대의 왕권강화와 국정의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고 청렴한 명신으로 청백리의 귀감이 되었다. 소학(小學), 가례(家禮), 성리학(性理學) 등을 즐겨 공부하였지만 뚜렷한 학보(學譜)를 가지고 있지 못하였던 그는 학문적 업적보다 국정을 수행하는 정치가로서의 성향이 강했다.

황희는 화려한 관직생활만큼이나 그의 청빈한 생활, 자상한 인품과 관련된 일화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하루는 태종이 그의 집에 들렀는데 마당에 멍석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그 멍석은 낡아서 많이 해져 있었고, 그것을 본 태종이 “이 자리는 뽑아서 가려운 데를 긁는 게 좋겠다.”고 할 정도로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또한 그는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아랫사람에게 자상하고 너그러운 인품을 지니고 있었다.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웃는 모습으로 대했기 때문에 호호야(好好耶)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1452년(문종 2) 9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황희는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금승리 마을은 대대로 장수 황씨의 터전으로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 대부분 장수 황씨의 선산이다. 황희 묘에서 정면에 마주하고 있는 산 중턱에는 그의 셋째 아들인 황수신(黃守身)의 묘가 자리 잡고 있는데, 세조 때 영의정에 올라 아버지에 이어 2대 영의정의 명예를 가문에 안겨준 인물이기도 하다.

황희 묘역에 오르면 우선 거대한 묘역의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인 조선시대 사대부 묘와 달리 매우 큰 봉분 규모를 지니고 있으며, 조선 초기 묘역의 형태인 장방형(長方形)의 구조를 띠고 있다. 그런데 또 하나 묘역의 특징은 봉분 앞으로 ㄷ자 모양의 호석(護石)을 쌓았는데 그 모습이 흡사 양팔을 내밀고 있는 형국이다. 이와 같은 묘제는 흔히 볼 수 없는 묘의 형태인데 이것은 봉분의 무너짐을 막기 위한 과학적인 방법의 조치로 생각된다. 즉 거대한 봉분의 흙이 누르는 힘을 양옆으로 분산시켜 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한 우리 선조들의 지혜라 할 수 있다.

묘역에는 봉분 앞 중앙에 상석과 향로석이 놓여 있으며 봉분 우측으로 묘비가 세워져 있다. 그 아래로 중앙을 약간 비껴 장명등이 놓여 있으며, 양쪽으로 동자석 2기와 문인석 2기가 단을 달리하여 세워져 있다. 묘역의 아래로는 그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과 신도비각이 자리 잡고 있다. 신도비각 내에는 비문이 마모된 원래의 신도비와 새로 세운 신도비 2기가 나란히 모셔져 있는데, 1505년(연산군 11)에 세워진 비로 신숙주(申叔舟)가 글을 짓고 안침(安琛)이 글씨를 썼다.


‘갈매기를 벗 삼아 여생을 보낸 정자’ 반구정

묘역에서 멀지 않은 문산읍 사목리 임진강변에는 황희가 관직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낸 반구정이 자리 잡고 있다. 그의 사후에도 그를 추모하는 8도의 유림들이 유적지로 수호하여 내려왔으나 애석하게도 6·25전쟁 때 모두 불타 없어져 일대 후손들이 부분적으로 복구해 오다가 1967년 시멘트로 개축을 하고 단청과 축대를 손보았는데 비로소 최근 정화사업 때 목조건물로 개축하여 정자의 원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반구정은 ‘갈매기를 벗 삼은 정자’를 뜻 한다. 반구정에 오르면 우선 정자 뒤로 흐르는 임진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미수 허목이 쓴 「반구정기(伴鷗亭記)」를 보면 ‘정자는 파주에서 서쪽으로 15리 지점에 있는 임진강 하류에 위치하는데 매일 조수(潮水)가 나가고 뭍이 드러나면 하얀 갈매기들이 날아든다. 주위가 너무도 펀펀하여 광야(曠野)도 백사장(白沙場)도 분간할 수 없고 9월이면 철새들이 첫 선을 보이기 시작하며 서해의 입구까지 30리 가량 된다.’라고 기록하여 당시의 아름다운 풍광을 묘사해 놓았다.

반구정을 돌아 내려오면 목조건물 3동이 단을 같이하고 있는데 가운데 건물이 황희의 영정을 모시고 제향을 받드는 영당 건물로 경기도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어 있다. 1455년(세조 1)에 건립된 방촌영당은 정면이 3칸, 옆면이 2칸인 초익공 양식의 맞배지붕 건물로 영당 내부 중앙에 감실을 두고 그 안에 영정을 모셨다. 건물 주위로는 방형의 담장을 두르고 정면 입구에 출입문인 솟을삼문을 두었다. 이곳에서는 매년 음력 2월 10일 황희의 탄신일에 제향을 받드는데 제향일에는 종중의 후손들과 지역의 유림 등 200여 명이 참석한다. 영당 옆으로 재실 건물인 경모재와, 황희의 고손인 월헌공 황맹헌의 부조묘가 좌우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에는 경내에 방촌기념관을 건립해 그의 업적과 일대기를 전시하고 있다.
[문헌목록]
『문화재안내문안집. 1』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파주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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