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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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 행궁지
北漢山城 行宮址
한자이름, 종목 및 지정번호, 지정일, 소재지, 시대로 구성된 표입니다.
지정구분 국가지정문화재
종목 및 지정번호 사적 제479호
명칭(한자) 북한산성 행궁지 (北漢山城 行宮址)
유형분류 유적건조물
지 정 일 2007-06-08
소 재 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69번지 지도로 보기
시 대 조선시대

북한산성 행궁지(北漢山城 行宮址)는 사적 제479호로 소재지는 경기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69번지이다.

북한산성은 1711년(숙종 37)에 유사시에 대비할 수 있도록 도성 북쪽에 쌓은 산성이다. 산성 축조와 함께 임금이 머물 행궁이 이듬해인 1712년(숙종 38)에 완성되었다. 도성 진산인 북한산에 산성을 축조하자는 주장은 임진왜란 직후부터 제기되었으나 병자호란 이후 성곽을 신축하지 못하도록 한 청의 정책 때문에 실현에 이르지 못하였다. 1710년(숙종 36)에 청의 정책이 완화되는 것을 계기로 북한산성 축성 논의가 구체화되었으며 1711년(숙종 37) 4월에 왕은 민진후(閔鎭厚 : 1659~1720)를 북한산구관당상으로 삼고 축성을 명하여 1711년 10월에 완성을 보았다. 당시 축성 공역은 훈련도감과 금위영, 어영청 군사들이 맡았다. 아울러 산성 내에 행궁을 짓도록 하여 성내 중흥사를 행궁으로 삼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산사태 등을 우려하여 상원봉 아래로 터를 잡았다. 호조판서 김우항(金宇杭 : 1649~1723)과 공조판서 이언강(橷彦鋼 : 1648~1716)을 북한행궁 영건당상으로 삼아 1711년 8월에 행궁 조성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이듬해 5월에 완공을 보았다. 행궁 외에도 곡식과 물품을 저장할 창고를 마련하도록 하여 1713년(숙종 39)에는 행궁 오른쪽에 상창, 중흥사 앞에 중창, 서문 내에 하창을 두었으며 행궁 앞에는 임금에게 올리는 쌀을 저장하는 호조창을 두었다. 산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머무는 성랑과 각 군문의 유영도 두었다. 또한 물을 저장할 수 있는 못을 두고 향림사, 적석사, 청량사, 승가사 등 사찰 21소도 갖추었다.

행궁이 완성되고 5년이 지난 1717년(숙종 43) 왕은 신료와 함께 행궁에 행행하여 유숙하였다. 훈련도감, 금위영의 군사들이 국왕을 수행하여 행궁 밖에 진을 치고 날이 저문 뒤에는 등불을 걸고 호위하였다. 1760년(영조 36)에는 왕이 북한산에 행행하여 행궁에서 중군을 사열하고 산성 수비책을 논하였으며 다시 1772년(영조 48)에도 행행하였다가 날이 저물어 환궁하였다.

북한행궁의 규모에 대해서는 1745년 승려 성능(聖能)이 지은 『북한지』에서 알 수 있다.
『북한지』에 의하면 행궁은 내전 및 외전 등과 그에 부속된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로 보면 내전이 54칸, 외전이 61칸으로 총 115칸이다. 구체적인 규모를 보면, 내정전은 28칸인데 좌우상방이 각각 2칸 대청이 6칸사면퇴가 18칸이다. 또 좌우행각방이 9칸, 청 5칸, 중문 1칸, 대문 3칸, 수라소 5칸, 중문 1칸, 측소 2칸이다. 외전은 역시 28칸으로 모든 체제는 내전과 같다. 대문 3칸, 북협문 1칸, 외북장중문 1칸, 이행각방 12칸, 루 4칸, 청 4칸이 있다. 또 헛간이 2칸, 중문 2칸, 외대문 3칸, 북변외대문 1칸이 있다. 이 밖에 『만기요람(萬機要覽)』이나 『동국여지비고』 등에도 북한지의 규모가 기록되어 있는데 세부적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비슷하다.

북한행궁은 고종대에 와서 한 차례 수리를 거쳤다. 고종대는 서양의 침탈로 국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도성 방어의 일환으로 북한산성의 중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1879년(고종 16) 8월 홍수로 산성 행궁과 관청이 기울어지고 무너지자 행궁을 개건하라는 왕명이 있었다. 이후에도 1893년(고종 30) 다시 행궁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고종실록』에 있다. 이후에 행궁의 수리는 보이지 않는 대신 1902년에 와서 일본인 세키노다다시에 의한 조사가 있었다. 세키노다다시는 한국의 건축유적을 조사할 목적으로 내한하여 북한행궁을 살펴보고 그 결과를 『한국건축조사보고』(1904)에 수록했는데 여기에 행궁에 대한 간단한 기록과 함께 전경 사진이 전한다. 책에 수록된 사진에 의하면 행궁은 전체적으로 내전과 외전으로 구분되며 각각의 중심부에 팔작지붕의 정면 7칸 규모 건물이 놓이고 주변으로 행각이 배치되어 있다. 내정전과 외정전은 남한행궁과 같은 규모의 건물로 추정되어 궁궐 침전의 평면형식을 따른 건물로 보인다. 행각은 모두 석축 위에 세워져 있다. 특히 외전의 행각은 지형이 경사짐에 따라 지붕을 3단으로 나누어 높이 차이를 두고 있는 모습이다. 외전 앞에는 3칸의 중문이 독립해서 세워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중문 앞의 뜰을 지나면 솟을삼문 형태의 대문이 놓이고 좌우로 행각이 연결되어 있는 모습이다.
20세기 초까지 남아 있던 행궁은 1915년 8월의 대홍수 때 건물이 붕괴되었다. 이후 행궁지는 잡목과 칡넝쿨이 덮이고 빗물이 건물터 가운데를 지나면서 지면이 파이고 석축이 이완되는 등 폐허화 되었다. 1990년대에 와서 북한산성의 일반인 출입제한이 해제되면서 등산로의 정비 차원에서 잡목이 제거되고 주변에 대한 표면적인 정비가 이루어졌다.

행궁은 산성 내 중앙에서 약간 남쪽에 치우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북한행궁의 주 진입로는 서울특별시 은평구 구파발 삼거리에서 양주방면으로 이동해서 북한산성 입구를 따라 대서문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산성의 서북 모서리에 있는 대서문에서 계곡물이 흐르는 골짜기를 따라 동남쪽으로 완만하게 오르막길을 따라가면 산성 가장 중심부인 중성문에 다다르게 된다. 중성문은 성문 좌우 약 500m 정도만 남아 있다. 중성문에서 남동쪽으로 물길을 따라가면 왼편에 중흥사가 나오고 더 진입하면 동편에 태고사가 있다. 태고사 앞으로 지나 경사로를 따라 남동쪽으로 가면 호조창지, 경리청상창지를 지나 남쪽 경사지 위에 행궁터가 나타난다. 행궁터는 현재 잡목과 잡초 사이에 장대석 기단이 몇 개의 단을 이루어 남아 있고 축대 위에는 여러 개의 건물 초석이 잔존하고 있다.

행궁지에 대해서는 1998년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하였다. 지표조사 당시에도 건물터 내로 큰비에 의해 형성된 골짜기가 생기고 좌우로는 위에서 내린 토사가 건물터를 덮은 상태였다. 그러나 행각 아래 놓였던 장대석 기단이나 건물 기단 및 초석 대부분이 잔존하고 있는 상태였다. 지상에 노출된 초석 등을 통해서 살펴본 바로는 행궁은 크게 후방에 내전이 놓이고 전방에 외전이 자리 잡았다. 내전의 뒤쪽으로는 석축을 쌓아 경계를 분명히 하고 경사면의 토사 붕괴를 막도록 했다. 내정전은 내전의 중심으르 이루던 곳으로 가로 19m, 세로10.8m 크기의 기단 위에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로 동북방향으로 놓였다. 초석의 배열로 보아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을 두고 좌우에 각각 정면 1칸, 측면 2칸의 방을 두었던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각 방에는 온돌시설이 확인되었다. 대청과 좌우 온돌방 주변으로는 사면에 퇴칸이 놓인 모습이었다. 내정전 앞에는 장대석 2단을 둔 석축이 쌓이고 중앙에 가로 6.5m, 세로 3.7m의 중문이 있었다. 중문 좌우에도 행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유구 확인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내정전 남서쪽 2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우물이 확인되었다. 우물은 잡석으로 조성되었으며 직경 50㎝, 깊이는1.8m가 확인되었다.

외전은 내전과 같은 규모의 정전이 있었으며 전면과 측면에 부속건물이 있었다. 외정전터로 추정되는 곳에 초석과기단석이 일부 남았지만 대부분 유실된 상태이며 부속건물도 대부분 유실되었다. 외전은 토사가 쌓이거나 석재가 아래쪽으로 유실되어 자세한 건물 배치 상태를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이며 행각이 놓였던 위치에서 석축이 부분적으로 확인되었다.
지표조사 과정에서 많은 양의 기와가 수습되었으나 자기편이나 다른 유물은 거의 확인되지 않았다. 기와는 ‘壽(수)’자가 새겨진 수막새나‘橛(용)’자가 새겨진 암막새가 확인되고 기타 초화문이 다수 확인되었다.

조선 후기 이후 도성의 방비는 강화의 강화산성과 광주의 남한산성 그리고 북한산성 세 곳이 거점이 되었다. 북한행궁은 도성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고 숙종, 영조가 이곳에 행행하여 도성 방어책을 논의하는 등 도성 방비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북한행궁은 산성의 가장 핵심되는 시설이었다. 행궁터 주변에는 창고지를 비롯해서 훈련도감이나 어영청, 금위영의 훈련장이 남아 있고 성내 동장대, 북장대, 남장대 등 성내 장대 위치도 잘 보존되어 있어서 행궁 주변에 산재해 있던 각종 군사시설의 배치 상태를 잘 알 수 있다. 행궁터는 비록 건물은 멸실되어 없지만 건물이 있던 위치가 그대로 남아 있고 일부는 초석이 잔존하는 등 향후의 조사를 통해서 그 전모를 파악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북한행궁은 조선시대 산성과 행궁 운영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의 하나이다. 북한행궁지에 대해서는 2009년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이 종합정비 기본계획 용역을 하여 보고서를 발간했으며 2010년 이후 행궁 건물에 대한 복원을 준비 중에 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대관 사적 제1권(증보판)』)

[문헌목록]
『(고양시)문화재대관』
『국가지정 문화재 지정보고서 : 사적편Ⅰ·Ⅱ』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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