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지정 문화재

스크랩하기
인쇄하기
즐겨찾기
퍼가기
카카오톡으로 퍼가기 페이스북으로 퍼가기
사세충렬문
四世忠烈門
한자이름, 종목 및 지정번호, 지정일, 소재지, 시대로 구성된 표입니다.
지정구분 도지정문화재
종목 및 지정번호 경기도문화재자료 제8호
명칭(한자) 사세충렬문 (四世忠烈門)
유형분류 유적건조물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와동 151번지 지도로 보기
시 대 조선시대

사세충렬문(四世忠烈門)은 경기도문화재자료 제8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와동 151번지이다.

임진왜란(1592~1598) 당시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申砬) 장군과 함께 왜적을 막아내다 순국한 장의공(壯毅公) 김여물(金汝岉, 1548~1592)의 애국 충정과 병자호란(1636~1637)에서 청군에게 패하자 순절로써 열녀 정신을 지킨 김여물 일가 4대 고부(姑婦)의 열녀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조정에서 하사한 정문(旌門)이다. 광덕산 자락 김여물의 묘역 아래에 자리잡은 이 건물에는 김여물의 충신 정문과 열녀 정문을 모셨다. 4대에 걸친 열녀는 김여물의 후실(後室)인 평산신씨(平山申氏), 김여물의 아들인 김류(金瑬 : 1571~1648)의 처 진주유씨(晉州柳氏), 김여물의 손자 김경징(金慶徵 : 1589~1637)의 처 고령박씨(高靈朴氏), 김여물의 증손자 김진표(金震標 : 1614~1671)의 처 진주정씨(晉州鄭氏)이다. 이들은 병자호란 때 적군에게 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강화도 강물에 던져 순절했다.

주위로 담장을 두르고 정면 3칸, 측면 2칸의 민도리 겹처마 팔작집을 세웠는데, 가운데 칸에는 민가 대문 형식의 문을 달고 ‘사세충렬문(四世忠烈門)’이라고 쓴 목판을 걸었다. 건물 안은 2칸으로 나눠어져 있다. 우측 방은 마룻바닥으로 김여물의 충신 정문이 있다. 좌측 방 벽 중간 지점에는 안쪽으로부터 좌로 돌아가며 4대 열녀의 정문을 세웠다.
현재 건물은 1971년 중수한 것이며, 그 후 1983년 경기도에서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하면서 보수 공사를 했다.

(자료출처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 경기도, 2005)

[문헌목록]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3)』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안산시사』
내용 더보기
※ 아래내용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여물(金汝岉)

생몰연대 : 1548(명종 3)∼1592(선조 25).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사수(士秀), 호는 피구자(披裘子) 또는 외암(畏菴). 평산 출신. 선공감정 약균(若鈞)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주목사 수렴(粹濂)이고, 아버지는 찰방 훈(壎)이며, 어머니는 신천 강씨(信川康氏)로 부사 의(顗)의 딸이다. 인조반정의 주역이자 영의정 류(瑬)의 아버지이다.

선조 즉위년인 1567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77년(선조 10)에 알성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문무를 겸비했으나 성품이 호탕하고 법도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해 높은 벼슬자리에는 등용되지 못하였다.
충주도사(忠州都事), 담양부사를 거쳐, 1591년에는 의주목사로 있었으나, 서인 정철(鄭澈)의 당으로 몰려 파직,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이 무략에 뛰어남을 알고 옥에서 풀어 자기 막중(幕中)에 두려고 하였다. 그런데 도순변사로 임명된 신립(申砬)이 그의 재능과 용기가 뛰어나고 충의로운 선비임을 알고 자기의 종사관으로 임명해줄 것을 간청해 신립과 함께 출전하였다.

신립이 단월역(丹月驛 : 현재의 충주 단월역)에 이르러 몇 명의 군졸을 이끌고 왜적의 북상로인 조령(鳥嶺)의 형세를 정찰할 때, 상주(尙州)에서 패주해 온 순변사 이일(李鎰)을 만나 조령 방어의 어려움을 알고 충주로 가 배수의 진을 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이것을 반대하고, 적은 수의 군사로 많은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먼저 조령을 점령해 지키며, 그렇지 못하면 평지보다는 높은 언덕을 이용해 왜적을 역습하는 것이 좋겠다고 강력히 주장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결국, 충주의 달천(㺚川)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신립을 따라 탄금대(彈琴臺) 아래에서 용전분투했으나 왜적을 당하지 못해 강에 투신, 순국하였다.

그는 충주 싸움의 패배를 예견하고 아들 김류에게 “삼도(三道)의 근왕병(勤王兵)을 요청했으나 한 사람도 응하는 자가 없다. 우리들이 힘을 다해 싸우나 아무런 도움이 없으니 안타깝다. 남아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본시 바라는 바이지만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고, 또 장한 뜻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고 한갓 재가 되어버리니 하늘을 우러러 한숨만 지을 뿐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또, 가족에게는 “내가 이곳에서 죽더라도 우리 일가는 모두 임금님의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돕되 결코 난을 피해 다른 곳으로 도망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광해군 초에 충절로써 정려(旌閭)되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뒤에 종래의 포상에 의심스러운 데가 많다고 하여 고쳐진 일도 있으나 1639년(인조 17)에 그의 아들 김류의 청에 의해 다시 정표(旌表)되었다.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1788년(정조 12)장의(壯毅)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리고 순조 때에는 신립 등과 함께 임진왜란 때 순의(殉義)한 충주 달천의 옛터에 제사를 지내 충절을 기렸다.
※ 문화재를 보고 묘사하는 단어, 떠오르는 인상이나 느낌 등을 한 두 단어로 입력해보세요.
※ 여러분과 같거나 다른 생각들을 확인해보세요.
이전 다음 도지정 문화재
공공누리 제4유형: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경기문화재단이 보유한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작품 사진의 경우 작품저작권자의 권리에 의해 보호를 받기 때문에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으니 문의 후 이용 바랍니다.

콘텐츠 정보에 만족하십니까?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