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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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박세당사랑채
西溪朴世堂舍廊채
한자이름, 종목 및 지정번호, 지정일, 소재지, 시대로 구성된 표입니다.
지정구분 도지정문화재
종목 및 지정번호 경기도문화재자료 제93호
명칭(한자) 서계박세당사랑채 (西溪朴世堂舍廊채)
유형분류 유적건조물
지 정 일 2000-04-17
소 재 지 경기도 의정부시 동일로128번길 36(장암동) 지도로 보기
시 대 조선시대

서계박세당사랑채(西溪朴世堂舍廊채)는 경기도문화재자료 제93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의정부시 동일로128번길 36이다.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은 조선 후기 문신이며 실학의 선구자이다. 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7세 때에는 큰 형인 박세규(朴世圭)마저 사망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면서 홀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원주·안동·천안 등지로 떠돌다가 13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고모부인 정사무(鄭思武)한테서 학문의 기초를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학문에 정진할 수 있게 된 것은 결혼 한 후 가정이 안정된 이후의 일이다.

박세당은 32세 되던 해인 1660년(현종 1) 증광시(增廣試)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예조좌랑, 춘추관 기사관을 거친 뒤 사간원 정언이 되어서는 공조판서 김좌명, 대사성 이은상을 탄핵하는 등 주관이 분명하고 강직한 관리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 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고 166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를 일시 다녀왔지만 당쟁을 혐오하여 관직을 그만두고 양주 석천동(현 의정부시 장암동)으로 물러났다. 한때 통진현감으로 나가 백성들의 구휼에 힘쓰기도 했으나,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두 아들을 잃자 일체의 출사 권유를 물리치고 석천동에서 농사지으며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몰두하였다. 이와 같은 맑은 기상은 당시 유림과 사대부들 사이에 박세당의 평판을 크게 드높여 문하에 제자들이 몰려들었고, 석천동 일대는 장자(長者)가 사는 곳이라 하여 장자울이라 불리게 되었다. 1703년 중추부판사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하고 주자학을 비판하는 독자적 견해를 발표하였다. 이에 반주자 (反朱子)로 사문난적(斯文亂賊)의 낙인이 찍혀 삭직당하였으며, 75세의 고령인 관계로 유배를 면하고 집에서 생활하다가 사망하였다. 후에 이인엽(李寅燁)의 상소로 신원되었다. 박세당은 이중환(李重煥)·안정복 (安鼎福)보다 앞선 시대의 실학파 학자로서, 농촌생활에 토대를 둔 박물학(博物學)의 학풍을 이룩하였으며, 글씨도 잘 썼다. 『사변록』 외에 『색경(穡經)』, 『서계집』 등의 저서가 있다.

이 가옥은 박세당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기거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집필을 하였던 장소에 후손들이 건립한 가옥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의 박세당 사랑채는 당시 선생이 기거하며 저술활동을 하였던 곳을 후손 및 후학들이 와가로 꾸민 가옥으로 원래는 안채와 안사랑, 바깥사랑, 그리고 행랑채로 이루어진 조선 후기의 사대부가의 규모를 하고 있었으나 6.25 전쟁시 대부분 소실되고 지금은 바깥 사랑채만이 남게 되었다.

이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반의 규모로서 남측으로 누마루가 덧붙여져 있는 을(乙)자형의 평면구조를 이루고 있다. 사랑방은 두 칸 규모에 뒤쪽으로 반칸씩 덧달아 후원으로 출입토록 하였고, 좌측으로는 빈칸 규모의 다락으로 오르는 문을 내었고 밑으로는 아궁이를 두었다. 이 두칸 규모의 사랑방 남동측으로 한칸 규모의 온돌방이 있고 반칸 돌출하여 누마로를 마주하고 있는 마루방이 있는데, 이 방과 누마루에서 주로 접빈객(接賓客)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누마루는 바닥면이 약 1자 반 가량 높고 삼면으로 머름을 둔 우물마루로 되어있다. 창호는 삼면 모두 머름 위에 사분합의 띠살문을 설치하였다. 이 누마루에 앉아 문을 열면 수락산과 산에서 흘러내리는 계류를 조망할 수 있어 자연과의 동화감을 느끼게 한다. 두 칸 규모의 사랑방은 정면 즉, 서측으로 반칸의 퇴칸을 두고 있는데 하부에는 모두 머름을 설치하고 그 위로 2분합의 띠살문을 이중으로 설치하였다. 이 방과 누마루를 마주한 방 사이에 정방형의 사랑대청이 한 칸 반 규모로 구성되어 있다. 기둥은 모두 방주로 치목되어 있고 가구는 오량가의 민도리집으로서 화려하지는 않으나 매우 짜임새 있는 가구의 틀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의 좌향은 동측의 수락산을 배산(裴山)으로 하고 서측 멀리 도봉산을 안산(案山)으로 하여 자리잡은 서향집의 좌향(坐向)을 하고 있어 보편적인 좌향인 남향이나 남서향, 그리고 남동향을 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향(向)보다는 배산임수의 자연지세를 더욱 중요시하여 집의 배치를 이루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랑채의 남측으로 약 10여미터 떨어져서 수락산으로부터 내려오는 계류가 흐르고 있는데, 이 계률 주변에는 궤산정, 청풍정 등 당시의 정자와 서당터가 남아있어 조선시대 은거선비의 사상과 생활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한편 1999년 서계종택(西溪宗宅)은 경기도 인정 ‘종가(宗家)’로 지정되었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포털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

[문헌목록]
『의정부 서계박세당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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