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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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정무공오정방고택
安城貞武公吳定邦古宅
한자이름, 종목 및 지정번호, 지정일, 소재지, 시대로 구성된 표입니다.
지정구분 도지정문화재
종목 및 지정번호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75호
명칭(한자) 안성정무공오정방고택 (安城貞武公吳定邦古宅)
유형분류 유적건조물
지 정 일 2000-04-17
소 재 지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길 66(덕봉리 246) 지도로 보기
시 대 조선시대

안성정무공오정방고택(安城貞武公吳定邦古宅)은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75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길 66(덕봉리 246번지)이다.

이 고택은 해주 오씨 충정공 등 명현을 배출한 유서깊은 곳으로 사랑과 안채를 한 몸으로 지으면서도 내외를 구별하는 방식이 독특하고 세부 치목 수법 등이 우수한 조선 중기의 가옥이다.
1510년(조선 중종 5년)에 덕봉리 252번지에 세워졌다가 1650년(조선 효종 원년)에 현재 위치로 이건되었다고 전하는데, 현존하는 건물은 문간채, 안채 겸 사랑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건립된 이래 정무공 오정방(吳定邦 : 1552∼1625), 천파공 오상(吳祥 : 1512~1573), 충정공 오두인(吳斗寅 : 1624~1689)에 이르기까지 해주 오씨 명현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오정방(1552~1625)은 조선중기의 무신으로 1583년에 무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1592~1598) 때 도총부도사로 영흥지방에서 의병 수천명과 함께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광해군 때 인목대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사직 당하였으나, 인조반정(1623)으로 포도대장에 다시 등용되고 이괄의 난(1624) 때는 왕을 공주까지 호종하였다. 뒤에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정무(貞武) 시호가 내려졌다.

가옥의 구성을 보면 문간채와 안채 겸 사랑채가 일곽을 형성하고 사당채는 사랑채 뒤쪽에 조금 비켜 별도의 담장을 둘러 일곽을 이루었다. 이 가옥은 안채와 사랑을 연속하여 단일채로 구성한 것이 특징인데, 이렇게 ㄱ자형 본채에서 일자(一字) 부분의 몸채를 길게 연장하고 중간에 사잇담을 두어 안팎으로 나누는 수법은 창덕궁 연경당과 비견되는 독특한 구성이다.

안채 부분의 구성은 대청 2칸을 중심으로 사랑쪽으로 건너방을 두고 ㄱ자로 꺾이는 부분에는 안방, 날개 부분에는 부엌과 부엌광을 두었다. 날개부는 홑집 맞걸이구조로 하여 지붕을 낮추고 전면은 창호와 벽면 위주로 매끈하게 구성하여 맞은 편 담장과 함께 세로로 긴 마당을 형성함으로써 엄정하면서도 긴장감 넘치는 공간을 구성 하였다. 사랑 부분은 전면과 측면에 연속하여 툇마루를 구성하고 기단을 높게 만들어 개방성을 두드러지게 함으로써 실제 규모에 비해 대단히 장중한 느낌을 갖게 된다.

전체적인 목재를 푼수와 치목 상태, 사랑 전면의 모죽임 팔각기둥과 난간, 안채 건너방 앞의 툇마루, 부엌 날개부의 다락과 창호, 뒤란쪽 찬장 구성 등의 수법은 목수의 안목과 솜씨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본 가옥의 배치 및 구성과 함께 높이 평가해야할 점이다.
현재 안채 부분만 담장이 둘려져 있고 사랑 부분은 주변에 아무런 경계도 없이 외부로 노출되어 있는데, 원래 외곽에 별도의 행랑채나 문간채, 담장 등이 있어 가옥 외부와 경계를 형성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자료출처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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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안성시청

오정방(吳定邦)

생몰연대 : 1552(명종 7)∼1625(인조 3)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영언(英彦), 호는 퇴전당(退全堂)이다. 호군(護軍)을 지낸 오수천(吳壽千)의 아들이며 수군 우후(水軍虞候)를 지낸 숙부 오수억(吳壽億)에게 입양되었다.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안성 출신이다. 선조 16년(1583) 무과에 장원급제하자 이이(李珥)로부터 영재라는 칭찬을 받았다.

당시 북쪽에서 이탕개(泥湯介)가 종성지방을 자주 침범하자 대사마(大司馬) 이일(李鎰)의 휘하에 들어가 종군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로 영흥지방에서 의병 수천명과 힘을 합쳐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이어 부령 부사 · 정평 부사를 지냈다. 그 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兼) 부총관(副摠管) · 포도대장(捕盜大將) · 군기시 제조(軍器寺提調) · 서북 순변사(西北巡邊使) 등을 지냈으며, 1603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품되었다. 이듬해 전라도 병사가 되고, 이어 경상우도 병사 겸 진주 목사와 황해도 병사를 역임하였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의 폐위를 적극 반대하다가 삭직당하였다. 인조 1년(1623) 인조반정 후 포도대장에 등용되었으며, 경상좌도 병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왕을 따라 공주에까지 호종하였다. 뒤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문헌목록]
『문화유적분포지도-안성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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