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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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창대군묘
永昌大君墓
한자이름, 종목 및 지정번호, 지정일, 소재지, 시대로 구성된 표입니다.
지정구분 도지정문화재
종목 및 지정번호 경기도기념물 제75호
명칭(한자) 영창대군묘 (永昌大君墓)
유형분류 유적건조물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고은리 산24-5번지 지도로 보기
시 대 조선시대

영창대군묘(永昌大君墓)는 경기도기념물 제75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고은리 산24-5번지이다.

조선 선조(宣祖)와 인목왕후(仁穆王后) 사이에 태어난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1614)의 묘소이다.
선조의 14명의 아들 중 유일하게 왕비의 소생으로 선조의 특별한 총애와 소북파(小北派)의 지지를 받으며 이미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 대신 세자로 책봉될 가능성이 많았으나 선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광해군 즉위 후 소양강을 무대로 시와 술을 즐기던 서양갑·박응서 등 7명의 서출들이 역모를 꾸몄다하여 ‘7서의 옥’이 일어났다. 그러자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파(大北派) 이이첨(李爾瞻 : 1560~1623) 등은 이들로 하여금 영창대군 추대음모를 거짓 진술케 함으로써 영창대군을 평민으로 강등시켜 유배시켰다. 영창대군은 그 뒤 유배지에서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복직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남한산성 아래에 안장되었다가 성남시 개발계획에 의해 1971년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봉분 아랫부분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둘레석을 둘렀으며, 그 앞에는 상석·향로석·묘비·동자석 등이 있다. 좌우에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한 쌍씩 세워져 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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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홈페이지)

영창대군(永昌大君)

생몰연대 : 1606(선조 39)∼1614(광해군 6)
이름은 의(㼁). 선조의 열네째 아들로 어머니는 인목왕후(仁穆王后)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김제남(金悌男)의 딸이다. 선조의 아들 중 유일한 정비 소생으로 왕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정례(權停例: 절차를 다 밟지 아니하고 거행하는 의식)로 공빈 김씨(恭嬪金氏)의 소생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그 뒤 정비의 소생인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선조는 세자를 바꾸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유영경(柳永慶)을 위시한 소북파(小北派)가 이 뜻에 영합했으나, 선조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왕은 죽으면서 대신들에게 영창대군을 돌봐달라는 유교(遺敎)를 내려 뒷일을 부탁하였다. 이 사실로 광해군을 지지하던 이이첨(李爾瞻) 등 대북파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그러던 중 1613년(광해군 5) 소양강을 무대로 시주(詩酒)를 즐기던 서양갑(徐羊甲)·박응서(朴應犀) 등 7명의 서출들이 역모를 꾸몄다는 이른바 ‘7서의 옥’이 일어났다.
이이첨 등은 이 역모 사건에 그들이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영창의 외조부 김제남도 관계한 것으로 진술을 유도하였다. 이 결과로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그 뒤 조야에서는 끊임없이 구원의 상소 등이 이어졌고, 형제의 의를 따지는 전은설(全恩說)과 여덟 살밖에 안된 ‘유자(幼子: 어린 아이)’라는 이유로 그를 비호하였다. 그러나 대북파의 계속된 요구로 이듬해 봄에 이이첨 등의 명을 받은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 살해되었다.『광해군일기』에 의하면 정항이 영창대군을 굶겨서 죽게 하였다거나 정항이 온돌을 뜨겁게 달구어 영창대군을 증살(蒸殺)했다고 되어 있으나,『인조실록』에 의하면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별장(別將) 이정표(李廷彪)가 음식물에 잿물을 넣어 영창대군을 죽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양자 사이에 논란이 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관작이 복구되었다.


7서의 옥(七庶之獄, 계축옥사(癸丑獄事))

1613년(광해군 5) 대북파(大北派)가 영창대군(永昌大君) 및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옥사.

선조 말엽부터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 간의 암투가 심각하였다. 1608년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파가 집권하였다.
대북파는 먼저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구실로 소북파의 영수인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을 사사(賜死)하게 하고 소북파를 축출하는 한편, 영창대군 및 그 측근에 박해를 가하고자 하였다. 때마침 1613년 3월 문경의 새재(鳥嶺)에서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 냥을 약탈한 강도사건이 일어났다.

범인 일당은 영의정을 지낸 박순(朴淳)의 서자 응서(應犀), 심전(沈銓)의 서자 우영(友英), 목사를 지낸 서익(徐益)의 서자 양갑(洋甲), 평난공신(平難功臣) 박충간(朴忠侃)의 서자 치의(致毅), 북병사를 지낸 이제신(李濟臣)의 서자 경준(耕俊), 박유량(朴有良)의 서자 치인(致仁), 서얼 허홍인(許弘仁) 등이었다.
이들은 허균(許筠)·이사호(李士浩) 및 김장생(金長生)의 서제 경손(慶孫) 등과 사귀면서 스스로를 죽림칠현(竹林七賢)·강변칠우(江邊七友)라 일컬었다. 이들은 일찍이 1608년에 서얼금고(庶孼禁錮)의 폐지를 주장하며 연명으로 소를 올렸다.

그러나 자신들의 주장이 거부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1613년 초부터 경기도 여주 강변에서 당여(黨與)를 맺었다. 그리고는 무륜당(無倫堂)을 짓고 나무꾼·소금장수·노비추쇄인(奴婢推刷人)을 가탁(假託)해 전국에 출몰, 화적질을 하였다.
그러던 중 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는 일을 저질렀다. 결국 이들은 피살자의 노복 춘상(春祥)이 뒤를 추적해 포도청에 고발하여 일망타진되었다.
이 때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과 그 심복 김개(金闓)·김창후(金昌後) 등이 포도대장 한희길(韓希吉)·정항(鄭沆) 등과 모의, 영창대군 추대 음모를 꾸미고는 국문 과정에서 이들에게 거짓 자복하도록 교사하였다. 이에 박응서가 비밀소를 올려 옥사가 시작되었다.

박응서는 이들이 1608년부터 명나라 사신을 저격하여 사회 혼란을 야기시키고 군자금을 비축, 무사를 모아 사직을 도모하려 했다고 하였다. 또 성사된 뒤에는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수렴청정을 돕기 위한 거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살인했다고 거짓 고변하였다.
호걸의 기개가 있어 괴수로 지목된 서양갑은 이를 완강히 부인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와 형제들이 심한 국문을 받다가 죽자, 수창자(首倡者)는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며 대비 또한 영창대군이 장성하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해 모의에 가담했다고 거짓 자복하였다. 그 밖에 사건에 연좌된 서얼 대다수는 불복한 채 죽었고, 박치의는 도망하였다.

이로써, 이 사건에 연좌된 종성판관(鐘城判官) 정협(鄭浹), 선조로부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잘 보살펴달라는 유명을 받은 신흠(申欽)·박동량(朴東亮)·한준겸(韓浚謙) 등 7대신 및 이정구(李廷龜)·김상용(金尙容)·황신(黃愼) 등 서인의 수십 명이 지정자(知情者)로 몰려 수금되었다.
또, 김제남과 인목대비가 선조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광해군을 아들로 삼았던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유릉(裕陵)에 무당을 보내어 저주하게 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리하여 김제남은 사사되고, 그의 세 아들도 화를 당하였다. 영창대군은 서인이 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이듬 해 강화부사 정항에게 살해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당시 영의정 이덕형(李德馨)과 좌의정 이항복(李恒福)을 비롯한 서인·남인들은 유배 또는 관직을 삭탈당하고 쫓겨났다. 그리고 이 옥사를 빌미로 1618년인목대비마저 폐위되어 서궁에 유폐되었다. 이후 대북파는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이 사건은 대북파가 전권(專權)을 장악하기 위한 목적으로 단순 강도범 박응서를 이용, 역모를 조작한 무옥(誣獄)으로 규정되었다.
[문헌목록]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3)』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경기 묘제 석조 미술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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