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지정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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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연서원
龍淵書院
한자이름, 종목 및 지정번호, 지정일, 소재지, 시대로 구성된 표입니다.
지정구분 도지정문화재
종목 및 지정번호 경기도유형문화재 제70호
명칭(한자) 용연서원 (龍淵書院)
유형분류 유적건조물
지 정 일 1976-08-27
소 재 지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로 72번길 1-5 지도로 보기
시 대 조선시대

용연서원(龍淵書院)은 경기도유형문화재 제70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로 72번길 1-5이다.

이 서원은 조선 숙종(肅宗) 17년(1691)에 이사상(李師相 : 1656~1725) 등의 남인계(南人系)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이곳에 은거하며 만년(晩年)을 보낸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 1561∼1631) 선생과 용주(龍洲) 조경(趙絅 : 1584∼1669)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남인 집권기인 숙종 18년(1692)에 ‘용연’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경기도 내 남인 세력의 유력한 근거지로서 선현 배향(先賢配享)과 향촌 교화(鄕村敎化)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한음 선생은 선조(宣祖) 13년(1580)에 문과에 급제한 후 선조 25년(1592)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올라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 사신 겐소(玄蘇) 등과 회담하고 대의로서 그들을 공박하는 한편, 명나라에 건너가 지원 출병을 성공시켰다. 병조판서(兵曹判書) · 우의정 · 좌의정 등을 거쳐 선조 35년(1602) 영의정에 올랐다. 광해군(光海君) 5년(1613) 영창대군(永昌大君 : 1606~1614)의 처형과 폐모론을 반대하다 탄핵되어 양근에서 세상을 떴다.

용주 선생은 광해군 4년(161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인조(仁祖) 4년 친시(親試)에 장원급제한 후 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지냈으며 병자호란(1636~1637) 때 사간(司諫)으로 척화(斥和)를 주장하였고 후에 대제학 · 예조판서(禮曹判書)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어, 제도를 쇄신하고 관리 등용에 공정을 기했다. 효종(孝宗) 9년(1658)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 서원은 한음 선생이 임진왜란(1592~1598) 때 세운 공로가 인정되어 고종(高宗) 5년(1868)에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이 시행되었을 때에도 존속했다. 당시의 경내 건물로는 사당 · 강당 · 동 · 서재(東 · 西齋) 등이 있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어 사당만 홀로 남아 있던 것을 1986년에 강당을 복원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평면 규모를 하고 있는 맞배지붕의 겹처마 건물로서 전면 1칸은 퇴칸으로 개방하여 제향(祭享)의 기능에 부합하도록 공간을 구성했다. 각 칸에는 이분합의 띠살문(세살문)을 달았는데 들어열개식으로 꾸며 놓았다. 초석과 기둥은 모두 원형이며 기둥 머리에는 보 방향으로 2단의 촛가지를 주두(柱頭)와 함께 놓아 결구한 이익공(二翼工)의 공포 형식을 이루었다. 내부의 가구는 오량가(五樑架)를 이루고 있는데, 종도리를 받치고 있는 대공(臺工)의 조각이 매우 화려하며, 첨차(檐遮)나 화반(華盤) 등으로 이루어진 건물의 전체적인 모습이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보인다. 사당에는 배면벽의 협칸 양측 벽에 감을 두어 두 분의 영정을 모셨고, 중앙 어칸의 벽에는 두 분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봄 ·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자료출처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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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경기문화포털

한음대감 이덕형의 생애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은 조선중기의 명신으로 본관은 광주이고 영의정 이극훈의 후손이며 지사 이민성의 아들이다. 158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가독서의 은전을 입었다.
1592년 예조참판 겸 대제학 재임 중 임진왜란으로 왕을 호종하여 정주에 이르러서 유성룡·이항복과 협의하여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할 것을 주청하여 윤허를 받자 청원사가 되어 명나라에 들어가 지원병 파병을 이끌어냈다. 1595년 우의정이 되고 이어서 좌의정이 되었으며 1602년에 영의정에 승차하였다. 1613년 정인홍·이이첨의 무리가 임해군·영창대군·김제남 등을 살해하고 인목대비 폐모론을 일으키자 극력 반대하다가 삭탈관직되어 양근의 용진에 낙향해 살다가 사망하였다. 시호는 문익(文翼)이고 포천의 용연서원, 상주의 근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이항복(오성)과 이덕형(한음)은 죽마고우인가?

이 두 사람은 포천을 상징하는 캐릭터로 등장하는 사람이다. 아마도 이렇게 되기까지는 근거 없이 세상에 퍼진 두 사람에 얽힌 일화·전설의 내용에 기인한 것으로 유추된다. 어린 시절 죽마고우로 이웃에서 자라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풍자, 그리고 재치와 해학이 흘러넘치는 재담과 작희의 주인공이었다는 이야기에는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은 분명히 죽마고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항복은 조상 대대로 포천시 가산면이 고향인데, 그는 부친의 내직 임직으로 1556년(명종 11)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서 출생하여 성장하였다. 이덕형은 양평이 고향인 사람으로 포천과 연관이 있다면 외가가 포천 자작동이라는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겠고, 『한음문고』 서문과 한음 연보에 “공은 한양의 남부 성명방 외제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명방’은 필동에서 남대문까지의 남산골을 가리키는 것이니 이덕형도 한양에서 출생한 것이다.

두 사람은 1578년(선조 11) 생원시·진사시에 함께 합격하면서 교분을 맺었으니 이항복 23세, 이덕형 18세의 청년 시절이었고 1580년에 이항복은 알성문과 급제, 이덕형은 별시문과 급제로 사가독서를 하면서 더욱 돈독한 동지가 되었다고 본다. 물론 이덕형이 소년시절 자작동 에서 글을 읽으며 공부하고 양사언을 따라 시문을 연마하는 등 포천에 왕래는 있었다. 임진왜란을 당하자 두 사람은 심오한 경륜으로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하여 사직을 바로잡아 역사에 그 명성을 남겼다.
오성과 한음 관련 문화재는 이항복선생묘(경기도기념물 제24호), 화산서원(경기도기념물 제46호), 용연서원(경기도유형문화재 제70호)등이 있다.
[문헌목록]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경기도 역사와 문화) 백문백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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