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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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장군묘
元均將軍墓
한자이름, 종목 및 지정번호, 지정일, 소재지, 시대로 구성된 표입니다.
지정구분 도지정문화재
종목 및 지정번호 경기도기념물 제57호
명칭(한자) 원균장군묘 (元均將軍墓)
유형분류 유적건조물
지 정 일 1980-06-02
소 재 지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산 82 지도로 보기
시 대 조선시대

원균장군묘(元均將軍墓)는 경기도기념물 제57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산82번지이다.

임진왜란(1592~1598) 때 철천량해전(漆川梁海戰: 1597)에서 전사한 원균(?~1597) 장군을 모신 유택이다. 묘역은 봉분을 중심으로 상석(床石)·장명등(長明燈)·망주석(望柱石)·무인석(武人石)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들 석물은 대부분 1981년 후손들에 의해 묘역이 정화되면서 갖추어진 것이다. 묘비의 비문은 전면을 한문으로 후면은 전면의 명(銘)을 한글로 옮겨 새겨 놓았다. 신도비(神道碑)는 묘역 아래에 있는데 역시 근래에 새로 건립한 것이며, 비문은 국한문혼용체(國漢文混用體)이다. 비문의 내용은 왕이 내린 교서(敎書)와 장군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원균은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조산만호(造山萬戶)로 있을 때 변장의 오랑캐를 무찌르는 데 공이 컸다.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수군절도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로 나아가 왜적과 접전하였으나 양국 간의 전쟁 준비 격차로 말미암아 개전 초부터 일방적인 패배의 연속이었고, 조정(朝廷)과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 1545~1598)에게 원병(援兵)을 요청하는 한편,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고군분투하였다. 마침내 이순신의 원병이 도착하자 합세하여 옥포·당포 등지에서 역전연승하였다. 그러나 포상 과정에서 이순신과의 공로 다툼이 심하여 불화가 발생하였다. 급기야 선조(宣祖) 26년(1593) 이순신이 신설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임명되어 지휘권을 장악당하자 크게 반발하였고, 얼마 후에는 전라좌병사(全羅左兵使)로 전속되었다. 이순신이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자, 이순신을 대신하여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삼도 수군을 이끌고 부산에 있는 적을 공격하던 중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여 전사하였다. 선조 37년(1604) 이순신·권율(권율: 1537~1599)과 함께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자료출처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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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평택시청 / 경기문화포털

조선 중기의 무신 원균 장군의 묘이다. 1597년 7월 4일 전사한 원균의 유품을 장군의 애마가 몰고 와서 가족에게 죽음을 알렸다는 설화가 있다. 원균은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군(水軍)을 통솔하는 절도사로서 옥포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적을 물리쳤다. 그 후 합포해전, 적진포해전 등 여러 차례에 걸친 크고 작은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선조30년(1597)에 칠천량해전에서 전사하였으며, 선조 36년(1604)에 권율, 이순신과 함께 선무 1등 공신으로 벼슬이 높여졌다. 이후 그의 묘는 임금이 녹훈 봉작 교서와 제문을 내려 봉표(능의 터를 미리 정하여 흙을 모아 봉분을 만들고 세우는 표)치제(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죽은 신하를 제사 지내던 일)하도록 할 때 잘 조성되었다고 본다.

묘역 안에는 신도비 1개, 문인석 2기, 무인석 2개, 돌로 만든 석등이 1기, 묘비 2기가 서있고, 애마총이 묘 아래쪽에 있다. 또한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望柱石)이 배치되어 있다. 국한문 혼용체로 쓴 비문에는 왕이 내린 교서와 장군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원균(元均)

생몰연대 : 1540(중종 35)~1597(선조 30) 원균의 본관은 원주(原州)이고, 자는 평중(平仲)이다. 중종 35년(1540) 정월 5일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 준량(俊良)의 아들로 현재 장군의 사당과 묘소가 있는 평택시 도일동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날쌔고 힘이 세었다고 하며, 자라서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이 되어 조산만호로 재직시에 북쪽 오랑캐의 토벌에 공을 세워 부령부사(富寧府使)로 발탁되었다. 뒤에 종성으로 옮겨서 병사 이일(李鎰)을 따라 시전부락을 격파했다. 선조 25년(1592)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되어 부임한 지 3개월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일본군이 침입하자 박홍이 지휘하던 경상좌수영은 저항도 못해보고 궤멸하고 말았다. 원균도 중과부적으로 맞서 싸우지 못하고 있다가 옥포만호(玉浦萬戶) 이운룡의 항의를 받고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순신은 자신의 경계영역을 함부로 넘을 수 없음을 이유로 원군요청에 즉시 응하지 않다가 5월 2일 조정의 출전명령을 받고 지원에 나섰다. 5월 6일 비로소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전함 24척을 거느리고 전라우수사 이억기 장군과 함께 거제 앞바다에 모였고, 다음날인 7일 새벽 옥포앞바다에서 진을 치고 있던 왜선을 공격하여 적선 26척을 격침․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합포해전·적진포해전·사천포해전·당포해전·당항포해전·율포해전·한산도대첩·안골포해전·부산포해전 등에 참전하여 이순신과 함께 일본 수군을 무찔렀다.

1597년(선조 30년) 이순신이 수군통제사를 파직당하고 투옥되었을 때, 후임으로 원균이 수군통제사가 되었다. 곧바로 부산앞바다로 공격해 들어갈 것을 지시받고 적의 동정을 살폈는데, 조선군을 속이는 계략을 쓰고 있음을 알아내고, 조정에 공격이 적절하지 않음을 건의하였으나 묵살되었다. 하는 수 없이 전투에 참여하여 웅천 앞바다에서 대승을 거두고 계속하여, 부산포로 공격하였으나 적들의 유인책에 말려 퇴각하려 했지만 영등포에서 적들의 배후 기습을 받았다. 이때에 해는 져서 바다 위는 어두워지고 쫓아오는 적은 바다를 덮고 오므로 군사들의 마음은 매우 위급한지라 원장군은 여러 장수들을 모아 말하기를 “오늘 전투계획은 오직 일심으로 순국할 따름이니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날 밤에 적은 야음을 타고 작은 배로 은밀히 조선 수군 진영사이로 뚫고 들어오게 하고 또 병선으로 밖을 포위하였다. 이것을 모르고 있던 조선 수군은 날이 밝을 때쯤 배에서 불이 일어남으로 급히 바라(놋쇠로 만든 타악기)를 쳐서 변고를 알렸으나 돌연 적선이 사방에서 공격해오고 탄환이 비 오듯 날으며 고함소리가 하늘을 진동하여 가히 대항하여 싸울 수 없었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먼저 닻을 거두고 달아남에 조선의 수군의 사기가 무너졌으므로 원균은 배를 버리고 연안으로 올라갔지만 결국 붙잡혀 살해되었다. 적이 물러간 후 원균의 시신을 거두어 지금의 묘소 자리에서 제사지냈고, 조정에서는 예에 따라서 제문과 부의를 하사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 36년(1603) 6월에 선무공신을 녹훈(錄勳:공을 기록)할 때에 이덕형, 이항복 등이 계(啓)를 올려 말하기를 “원균이 처음에는 군사가 없는 장수로 해상전투에 참가하였으나, 그 뒤에 수군을 패하게 한 과실이 있으니 이순신, 권율과 더불어 같이 할 수 없어 내려서 이등으로 기록하였나이다.”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적의 공격을 처음 당하였을 때에 원균이 이순신에게 구원을 청하였던 것이요, 이순신이 스스로 달려간 것이 아니었으며 적을 공격함에 있어서는 원균은 스스로 죽기를 결심하고 매번 선봉이 되어 용감하게 싸워서 먼저 올라갔으니 승리의 공이 이순신과 꼭 같으며 원균이 잡은 적괴(賊魁: 왜군의 우두머리를 일컬음)와 누선은 도리어 이순신에게 빼앗긴 것과 같은 꼴이다.

또한 이순신을 대신하게 되어서는 여러 번 부산 앞바다로 들어가 싸울 수 없다는 뜻을 힘써 말하였으나 비변사에서는 독촉하고 원수(元帥:당시 권율 장군)는 잡아다 곤장을 치니 드디어 원균은 패전할 줄을 알면서도 할 수 없이 진을 떠나서 적을 공격하다가 전군이 괴멸하고 그 자신도 순국하였으니, 이것은 원균의 용맹함이 삼군에 으뜸일 뿐 아니라 그의 지략이 또한 출중한 것이었다. 옛적에 가서한이 가슴을 쓰다듬으며 농궐에 나갔다가 적에게 패한 바 있었고, 양무적은 반미에게 협박을 당하여 눈물을 뿌리고 할 수 없이 싸우다가 드디어 적에게 패하여 죽었으니, 어찌 이러한 일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으리오. 고금의 인물을 성패만으로써 논할 것이 아니라 그의 운과 시기가 어긋나서 공은 무너지고 일은 실패한 것을 생각할 때 마음은 아프고 불쌍하게 생각되는 바이니라. 원균의 눈이 지하에서 감기지 못하리라.”하고 일등 공신의 세 번째에 책봉되었다.

그리하여, 선조 36년(1603) 효충장의적의협력 선무공신(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의 호를 하사받았으며,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원릉군(崇錄大夫議政府左讚成兼判義禁府事原陵君)으로 추증되었다. 이듬해 5월 18일에 임금이 사신을 내어 가묘에 제사지내게 하면서 치제문을 보냈다.

원균 장군은 비열하고 전쟁에 패하기만 한 장수인가?

무인 집안 출신의 용장(勇將)

평택시 도일동은 원주 원씨의 5백 년 세거지이다. 원균은 경상도병마절도사 원준 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대대로 원씨 집안은 뛰어난 무인들을 배출하였다.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원준량을 비롯하여 형제와 조카들도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하였다. 원균은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성격이 호탕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한 끼에 밥 한 말, 술 한 말, 꿩이나 닭 서너 마리를 먹어치우는 대식가였다. 25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한 뒤에 는 이일 등과 함께 함경도 일대에서 여진족을 토벌하여 명성을 얻었다. 조산만호(造山萬戶)로 있을 때에는 여진족을 토벌한 공로로 부령부사로 특진하였다.

두만강 부근 종성에서 함경병사 이일을 따라 시전부락을 격파할 때에도 적은 병사들로 적진에 뛰어들어 적장의 목을 베었기 때문에 여진족들은 원균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하였다. 원균의 무인다운 풍모는 선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중에 선조가 원균을 신임하고 두둔한 것도 평소에 가졌던 깊은 믿음 때문이었다.

원균이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부임한 것은 임진왜란 두 달 전인 1592년(선조 25) 2월이었다. 하지만 두 달은 오합지졸에 불과하였던 군대를 재편하고 기강을 바로 잡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그 해 4 월 왜군이 700여 척의 함선과, 16만 명의 군대, 9천여 명의 수군으로 침략하자 훈련부족에 전투경험이 없었던 경상좌수영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왜군의 기세에 놀라기는 원균의 경상우수영도 마찬가지였다. 혹자는 당시 경상우수영에는 수군 1만여 명에 판옥선 70여 척이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이순신과 이억기의 전라좌·우수영의 전함이 각각 25척 내외였으므로 기껏해야 40척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병사들이 도망치는 가운데 함선 40여 척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원균은 동생 원전을 시켜 신속하게 전라좌수영에 구원을 요청하는 한편, 왜군의 수중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거제도의 함선과 무기, 군량미를 불에 태우거나 수장시킨 뒤 나머지 함선으로 전투태세를 갖췄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부대와 연합한 뒤에는 옥포·당포· 한산도 등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실록』에는 원균이 전투에 임했을 때 선봉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적진에 뛰어들어 적을 당파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원균은 1597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된 뒤 통제사에 올랐다. 당시 조정의 여론은 전공으로나 전투능력으로 평가할 때 이순신을 대체할 수 있는 인물은 원균밖에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패장의 멍에와 후대의 부정적 평가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르자 조정과 도원수 권율은 부산포의 왜군 본진을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부산포 공격은 이순신을 파직하고 원균을 통제사로 임명한 이유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부산포 공격은 수많은 난제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1597년 당시 왜군의 전투력은 왜란 초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보강되었고 조선 수군에 대한 대응전술도 잘 준비되어 있었다. 조선 수군도 함선을 새로 건조하고 군졸들을 훈련시켜 전력이 증강되었지만, 전염병 등으로 입은 손실이 컸고 무엇 보다 이순신 휘하에 있었던 장수들이 원균의 지휘를 받지 않으려 하면서 결속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더구나 경상도 해안이 왜군에게 점령된 상황에서 수군 단독으로 공격하는 것은 섶을 지고 불어 뛰어드는 격이었다.

원균은 육군과 수군의 합동작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원균의 주장은 도원수 권율에 의해 묵살되었다. 냉정함을 상실한 상태에서 결행한 한두 차례의 작은 전투에서 패배한 뒤에는 출전을 머뭇거린다는 이유로 권율에게 곤장까지 맞았다. 원균은 치욕에 몸을 떨었다. 평생을 전장에서 보내면서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설 줄 몰랐던 용장에게 곤장은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해 원균은 틀어 박혀 술만 마셨다. 결과적으로 칠천량 해전의 패배는 참혹한 것이었지만, 패배는 예상했던 일이 현실화된 것뿐이었다.

원균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왜란 당시 우호적으로 평가한 사람들은 선조와 서인들이었다. 선조는 처음에는 원균의 용맹함과 무인적 풍모에 대한 호감을 가졌다가 나중에 는 이순신 처리문제를 비롯하여 자신의 실수에 대한 비판을 불식시키기 위해 두둔하였다. 윤근수·윤두수·김응서와 같은 서인들은 남인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과, 거짓 장계를 올린 뒤 나중에는 왕과 조정을 능멸하는 이순신에 대한 반감으로 원균 옹호 대열에 합류하였다.

반면 원균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사람들은 유성룡·이원익으로 대표되는 남인 계열과 이순신이었다. 사실 이순신의 불만은 상반된 성격차이에서 온 것이기도 하겠지만, 나이로 보나 무과급제 순서로 보나 그 동안의 공로로 볼 때 자신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원균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일 수도 있다. 남인들은 과거 부령부사 시절의 치리(治理) 문제를 비롯하여 경 상우수사 시절 이순신과의 갈등, 충청병사 시절의 치리(治理)에 대하여 부정적인 면만 부각시켰다. 이순신과의 갈등에 대해서도 원인보다는 불같이 화를 내는 현상에만 초점을 맞춰 비판의 강도를 높였다. 더구나 이순신은 『난중일기』를 남겨 자신의 입장에서 원균을 바라볼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였고 유성룡의 『징비록』이 이를 뒷받침하였지만, 개인기록을 남기지 않은 원균은 무엇으로도 자신을 변호할 수 없게 되었다.

부정적 평가는 양난 이후 더욱 심해졌다. 인조 때 이순신의 입장이 반영된 『선조수정실록』이 편찬되고, 효종 때 북벌운동 과정에서 이순신이 크게 부각되면서 원균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대세를 이뤘다. 부정적 평가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은 국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출판된 소설류다. 신채호의 『이순신전』(1908)을 필두로 이광수의 소설 『이순신전』(1932)이 나오면서 둘 사이는 영웅과 간웅으로 갈렸고, 제3공화국 정부의 정책적 지원으로 출판된 이은상의 『성웅 이순신』(1969)과 일련의 영화들은 원균을 ‘민족의 공적(公敵)’으로 만들었다. 소설에서 원균은 충효의 상징이며 완전한 인격체인 성웅 이순신을 모함하고 비열한 짓을 일삼는 간신모리배로 묘사되었다. 원균이 주장(主將)이었던 경상우수영과 전라 좌·우수영의 연합작전은 모두 이순신이 주도한 전투였으며, 원균의 구원요청을 받은 뒤에도 15일 동안이나 출전을 미루다가 정운의 위협에 못 이겨 마지못해 출전하였던 이순신의 과오는 감춰졌다.

술과 여자를 좋아해서 치리(治理)에는 부족하였지만, 성격이 호탕하고 싸움에는 용맹하며, 청렴하고 부하들을 아껴서 신뢰를 얻었고, 상당산성을 수축할 때는 공사장에 토굴을 파고 기거하며 공사를 독려하였다는 『실록』의 기록은 위대한 성웅을 위해 묻혀버렸다. 역사적으로 원균이 이순신보다 훌륭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분명 이순신은 불세출의 영웅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영웅이 성웅일 수는 없고, 한 사람을 성웅화하기 위해 다른 훌륭한 장수가 매도되어서는 안 된다. 역사적으로 이순신은 이순신이고, 원균은 원균일 뿐이기 때 문이다.
[문헌목록]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경기도 역사와 문화) 백문백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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