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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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선생묘
柳寬先生墓
한자이름, 종목 및 지정번호, 지정일, 소재지, 시대로 구성된 표입니다.
지정구분 도지정문화재
종목 및 지정번호 경기도기념물 제62호
명칭(한자) 유관선생묘 (柳寬先生墓)
유형분류 유적건조물
지 정 일 1981-07-16
소 재 지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동오리 산157번지 지도로 보기
시 대 조선시대

유관선생묘(柳寬先生墓)는 경기도기념물 제62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동오리 산157번지이다.

조선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청백리에 선정된 하정(夏亭) 유관(柳寬, 1346~1433)선생을 모신 유택이다. 유관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자는 경부(敬夫), 호는 하정(夏亭),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고려 공민왕 20년(1371)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조선이 건국되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었다. 태조 6년(1397) 대사성에 이어서 형조ㆍ이조의 전서(典書)를 지냈고, 강원도ㆍ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태종 1년(1401) 대사헌으로서 불교를 극력 배척하였고, 이어 간관을 탄핵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되기도 하였다. 이후 다시 등용되어 태종 10년에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으로 『태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세종 6년(1424) 우의정으로 승진, 『고려사』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는 성품이 청렴검소하고 청빈하여 세종때 청백리에 녹선되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고, 저서로는 『하정집(夏亭集)』이 있다.

봉분은 쌍분으로 부인과의 합장묘이다. 봉분의 형태는 장대석(長臺石)을 이용한 장방형의 호석(護石)을 두른 장방원형분(長方圓形墳)으로, 조선 초기의 전형적인 분묘 형태이다. 봉분 앞에는 장대석을 이용하여 2단의 계체석(階砌石)을 설치하여 놓았고, 묘비 2기가 함께 있다. 구비(높이 143cm, 폭 44cm, 두께 23cm)는 묘의 왼쪽에 있는데 찬·서자는 비가 마모되어 알 수 없다. 묘 중앙에는 1998년에 세운 신비(총높이 195㎝, 폭 54㎝, 두께 24㎝)가 있고, 봉분 앞에는 각각 상석과 향로석을 별도로 배치하였다. 단 아래 중앙에는 장명등이 있고 그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이 1쌍씩 갖추어져 있다. 그런데 석물 중 묘비의 비신(碑身) 부분과 장명등의 몸체 부분, 상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敲石), 좌측의 향로석은 후대에 새로 교체된 것으로 판단된다.

마을입구에 세워진 신도비(전체높이 228cm, 폭 68cm, 두께 25cm)는 고종 28년(1891)에 건립된 것으로 신석우(申錫愚)가 비문을 짓고, 구한말 개화당의 거두인 김홍집(金弘集, 1842~1896)이 글씨를 썼다. 화강암재 이수에 비신은 대리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면 상단에 『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이라 음각되어 있다.

(자료출처 : 양평문화원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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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홈페이지)

유관(柳寬)

1346(충목왕 2)∼1433(세종 15).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초명은 유관(柳觀), 자는 몽사(夢思)·경보(敬甫), 호는 하정(夏亭). 고려 명종 때 정당문학(政堂文學) 유공권(柳公權)의 7대손이며, 삼사판관 유안택(柳安澤)의 아들이다.
1371년(공민왕 20) 문과에 급제해 전리정랑(典理正郎)·전교부령(典校副令)을 거쳐 고려 말기에 봉산군수·성균사예(成均司藝)·사헌중승(司憲中丞) 등을 역임하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개국원종공신이 되고, 이어 내사사인(內史舍人)으로 왕명에 의해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진강(進講)하였다.

1397년(태조 6)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대사성을 거쳐 다음 해 형조전서를 지냈다. 1401년(태종 1) 대사헌으로서 상소해 불교를 적극 배척했고, 이어 간관을 탄핵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가 곧 다시 서용되어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되었다. 그러나 다시 무고를 받아서 문화에 유배되었다.
그 뒤 풀려나와 1405년 전라도도관찰사를 지내고, 이듬해 예문관대제학을 거쳐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을 거쳐 형조판서로 병서습독제조(兵書習讀提調)를 겸했고, 1409년 예문관대제학으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했으며, 이듬해『태조실록』 편찬을 주관하였다.
그 뒤 참찬·찬성 등을 역임하고 1418년(세종 즉위년) 다시 대제학으로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하고, 이어 판중군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事) 등을 거쳐 1421년 다시 대제학으로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1423년 지춘추관사로 『고려사』 개수의 명을 받고, 이듬해 우의정에 승진, 『고려사』를 수교(讎校: 다른 것과 비교해 교정함.)해 올렸다. 1425년 벼슬을 사직했으나 허락받지 못했고, 81세가 된 이듬해 우의정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세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났다.
특히, 성품이 매우 청렴하고 청빈하였다. 한번은 장마로 집에 비가 줄줄 새자, 우산을 받쳐들고서 부인에게 “우산이 없는 집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문화의 정계서원(程溪書院)에 제향되었다.
[문헌목록]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양평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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