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문화재

스크랩하기
인쇄하기
즐겨찾기
퍼가기
카카오톡으로 퍼가기 페이스북으로 퍼가기
적용
정약용선생묘
丁若鏞先生墓
한자이름, 종목 및 지정번호, 지정일, 소재지, 시대로 구성된 표입니다.
지정구분 도지정문화재
종목 및 지정번호 경기도기념물 제7호
명칭(한자) 정약용선생묘 (丁若鏞先生墓)
유형분류 유적건조물
지 정 일 1972-05-04
소 재 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747번길(능내리 산75-1번지) 지도로 보기
시 대 조선시대

정약용선생묘(丁若鏞先生墓)는 경기도기념물 제7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747번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실학의 대가였던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 선생의 묘소이다. 정약용은 조선 영조(英祖) 38년(1762)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16세에 이미 성호(星浩) 이익(李瀷, 1681~1763)의 학문에 접하면서 민생을 위한 경세(經世)의 학문에 뜻을 두고 이후 당시의 새로운 학문인 서학(西學)에 흥미를 가졌다. 정조(正租) 13년(1789)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고, 정조 16년(1792)에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이 되어 축조 계획 중이었던 화성(華城)의 성제(城制)를 작성하였다. 또한 거중기를 제작하여 화성 축조의 공정을 단축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정조 18년(1794) 경기도암행어사를 거쳐 정조 19년(1795) 병조참의(兵曹參議)가 되었는데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체포되자 형 정약전(丁若銓)과 이 사건에 연관되어 충청도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다. 순조(純祖) 원년(1801)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경북 포항 장기로 유배된 뒤에 다시 전남 강진으로 옮겨졌다. 18년의 유배 동안 경서학(經書學)에 전념, 실학의 대가가 되어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등 다수의 책을 저술하여 정치·경제 등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봉분은 단분이며 숙부인(淑夫人) 풍산홍씨(豐山洪氏)와의 합장묘(合葬墓)이다. 묘소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 망주석 1쌍이 설치되어 있고, 후에 곡담과 묘비 1기가 추가되었다. 묘비는 팔작지붕형 가첨석(加檐石), 오석제 비신(烏石製碑身), 기대(基臺)로 구성된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양식이다.

(자료출처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문헌목록]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남양주문화재대관』
※ 문화재를 보고 묘사하는 단어, 떠오르는 인상이나 느낌 등을 한 두 단어로 입력해보세요.
※ 여러분과 같거나 다른 생각들을 확인해보세요.
이전 다음 경기도 문화재
공공누리 제4유형: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경기문화재단이 보유한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작품 사진의 경우 작품저작권자의 권리에 의해 보호를 받기 때문에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으니 문의 후 이용 바랍니다.

콘텐츠 정보에 만족하십니까?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