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지정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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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손묘역석물
鄭昌孫墓域石物
한자이름, 종목 및 지정번호, 지정일, 소재지, 시대로 구성된 표입니다.
지정구분 도지정문화재
종목 및 지정번호 경기도문화재자료 제85호
명칭(한자) 정창손묘역석물 (鄭昌孫墓域石物)
유형분류 유적건조물
지 정 일 1994-04-20
소 재 지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 산37-1번지 지도로 보기
시 대 조선시대

정창손묘역석물(鄭昌孫墓域石物)은 경기도문화재자료 제85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 산37-1번지이다.

정창손(1420~1487)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세조(世祖)~성종(成宗)에 이르는 3대 조정에서 15년 간 재상을 역임하였다. 세조 때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 예종(睿宗) 때 익재공신(翊載功臣) 3등, 성종 때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으로 세 공신에 책훈되었으며 중종(中宗) 때 청백리(淸白吏)에 선정되었다. 또한 『고려사(高麗史)』 · 『세종실록(世宗實錄)』 등 각종 편찬 사업에 참여하였다.

정창손의 묘역은 원래 광주 방제동에 있었는데 사후(死後) 연산군(燕山君) 10년(1504) 폐비 윤씨(廢妃尹氏) 사건에 연루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되고 신도비(神道碑)와 석물이 함께 파손되었다. 중종 원년(1506)에 바로 신원(伸寃)되어 개장(改葬)하고 석물을 다시 세웠으며 인조(仁祖) 원년(1623)에는 신도비를 다시 세웠다. 한편 그와 부인의 묘역은 2기의 묘역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원래의 소재지인 방제동이 도시 개발되어 종중에서는 1970년 현 위치로 이장하였다. 이 때 하나의 봉분으로 합장하고 이전의 석물과 새로 제작한 석물을 함께 배치하였다. 이에 따라 묘역의 모습이 심하게 변하였고 석물은 묘비 2기, 문인석 2쌍, 신도비 1기가 남았다.

부인의 묘비는 개석(蓋石)이 조선 초기의 전형적인 양식인 화관석(花冠石) 형태로 세조 2년(1456)~성종 17년(1486)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묘비는 월두형(月頭形) 비신(碑身)을 기대(基臺)에 꽂아 세우게 된 것으로 중종 원년에 건립한 것이다. 문인석 2쌍은 모두 조선 전기의 양식인 복두(幞頭)를 쓰고 공복(公服)에 홀(笏)을 든 형상이며 그의 묘역에 있던 것이다.
신도비는 월두형 비신 · 기대 · 기대를 받치는 대좌(臺座)로 구성 되어 있다. 원래의 신도비는 서거정(徐居正 : 1420~1488)이 찬(撰)하여 성종 19년(1488)에 세웠다. 연산군 10년에 파손되어 중종 원년 개장할 때에도 유독 신도비만은 복원되지 못하였다가 한준겸(韓浚謙 : 1557~1627)이 서거정의 비문에다 덧붙여 쓰고 비문을 써서 인조 원년에 다시 건립하였다.

(자료출처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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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양평문화원

정창손(鄭昌孫, 1402~1487)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는 효중(孝仲), 호는 동산(東山), 본관은 동래(東來)이며, 중추원사(中樞院事) 정흠지(鄭欽之)의 아들이다.
세종 8년(1426)에 문과에 급제한 후 집현전의 저작랑(著作郞)과 교리를 역임하였다. 세종 25년 집현전 응교(應敎)가 되어 한글 창제에 반대하다가 파직, 투옥되기도 하였고 세종의 불경사업에 반대하여 좌천되기도 하였다. 세종 29년(1447) 문과중시에 등재한 후 집현전 부제학으로 춘추관편수관 수사관을 겸직하면서 『고려사』,『세종실록』,『치평요람(治平要覽)』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문종때에는 대사헌, 대제학, 병조판서를 지내며 『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단종 1년(1453) 이조판서, 세조 1년(1455) 좌찬성으로 이조판서를 겸했으며, 좌익공신(左翼功臣) 3등에 녹훈되고 봉원군(蓬原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성삼문, 박팽년의 단종복위음모를 고변한 공으로 좌익공신(左翼功臣) 2등에 올랐고,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세조 4년(1457)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1468년 예종 즉위후 남이(南怡), 강순(康純)의 옥사를 다스려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이 되었다.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이 되었으며 1472년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성종 2년(1471)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이 되고 성종 6년에 다시 영의정을 지냈다.
정창손은 성종 16년(1485)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3대에서 15년간 영의정을 역임하였으며 그가 세상을 떠나자 왕은 청빈재상(淸貧宰相)이라하여 부의를 후사(厚賜)하였다. 그 후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때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의 폐비론에 참가한 죄로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으나, 중종 1년(1506)에 신원되고, 중종 9년(1514)에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성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정창손의 묘역은 신도비문에 의하면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하면서 신도비와 함께 파괴되었다가 중종 반정으로 신원이 복귀되면서 신도비를 제외하고 다시 건립하였다고 한다. 묘는 원래 경기도 광주 방제동에 있었던 것으로 도시개발로 1970년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새로 조성한 것으로 부인묘와 하나의 봉분으로 합장하고 이전의 석물과 새로운 석물을 함께 배치하였다. 묘의 좌측에 부인묘비와 정창손의 묘비가 있고 묘의 좌우에는 2조의 문인석을 배치하였는데 상석과 망부석, 장명등, 동물석상은 근래에 제작된 것이다.

신도비(높이 186.5㎝, 폭 73㎝, 두께 24.5㎝)는 이수가 없는 월두형(月頭形)으로 원래 서거정이 성종 19년(1488)에 지었으나, 파괴되었던 것을 개장(改葬)때 외손 이원익(李元翼)을 중심으로 이시언(李時彦), 심열(沈悅), 최명길(崔鳴吉) 등이 인조 1년(1623)에 재건하였다. 비문은 정창손의 외후손인 한준겸(韓浚謙)이 추찬(追撰)하고 역시 외후손인 심열(沈悅)이 글씨를 썼고 전(篆)하였는데 정창손의 연대기와 신도비가 파쇄된 후 다시 건립된 사정 등이 기록되어 있다.
[문헌목록]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문화재안내문안집.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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