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지정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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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향교
砥平鄕校
한자이름, 종목 및 지정번호, 지정일, 소재지, 시대로 구성된 표입니다.
지정구분 도지정문화재
종목 및 지정번호 경기도문화재자료 제20호
명칭(한자) 지평향교 (砥平鄕校)
유형분류 유적건조물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지평로 333(지평리 343) 지도로 보기
시 대 조선시대

지평향교(砥平鄕校)는 경기도문화재자료 제20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지평로 333(지평리 343번지)이다.

조선 영조(英祖) 49년(1773)에 뛰어난 유학자들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그 외의 지평향교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을 한 대성전(大成殿)과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명륜당(明倫堂) 그리고 내삼문과 외삼문이 있다.
향교의 배치는 대성전과 동·서무(東·西廡)를 중심 건물로 하여 이루어지는 제향 공간(祭享 空間)과 명륜당과 동·서재(東·西齋)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강학 공간(講學空間)으로 구성된다. 제향 공간은 공자(孔子)와 그의 제자 그리고 중국과 우리 나라의 성현과 유학자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정기적으로 제사를 올리는 장소이다. 강학 공간은 공자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는 곳으로 과거에는 명륜당 내의 대청마루에서 유생(儒生)들이 강학을 하였다. 이러한 강학 공간과 제향 공간의 전후 위치 관계를 따져 향교의 배치는 크게 전학후묘(前學後廟), 또는 전묘후학(前廟後學)으로 대별된다.
지평향교는 대성전과 명륜당만 있을 뿐 대성전 앞의 좌우에 부속되어 놓여지는 동·서무와 명륜당 앞의 부속 건물인 동·서재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자료출처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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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양평문화원

지평향교의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조선초기의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학교조에 ‘在郡南一里’라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초기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창건 이후 임진왜란으로 인한 피해나 기타 다른 이유로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지평향교의 연혁이나 중수에 관련 향교소장 고문서나 기문 등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다만 『학교등록(學校謄錄)』에는 지평향교의 이건과 중수에 관련된 여러 차례의 기록이 있어 부족한 지평향교의 연혁을 보완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학교등록』 효종 1년(1650) 기사에 의하면 경기 감사 최혜길(崔惠吉)의 장계로 지평향교를 이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평향교는 이건한 지 30여 년 만에 다시 옮겨지게 된다.
이때의 이건 과정은 『학교등록』숙종 9년(1683) 7월 29일 기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사에 의하면, 지평 현감 민진장(閔鎭長)이 경기 감사에게 첩정(牒呈)을 올려 향교가 오래되어 무너질 지경이고, 장소가 너무 협소하며, 동·서무에는 위판을 둘 곳이 없어 대성전에 위판을 모시고 있다는 등의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향교이전을 청하였다. (향교 중수시 지평현감은 민진장(閔鎭長)이다. 그는 민정중(閔鼎重)의 아들이며, 송시열의 문인이다.) 그러자 국가에서는 경기 감사에게 직접 향교의 상황을 살핀 후에 다시 보고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이해 9월 21일에 경기감사 김우석(金禹錫)이 장계를 올려 직접 향교를 살펴 본 결과 역시 향교가 너무 좁고, 부득이 향교를 옮겨야 할 형편이라고 보고하여 허락을 받아 향교를 옮기게 되었다.
이때의 중수 사적은 1987년에 향교를 해체 보수하던 중 발견된 상량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상량문은 1684년에 기록된 것인데 숙종 10년(1684) 향교를 현위치로 이건하였으며, 도유사 정일관(鄭一貫)을 비롯해 편도수(都片手) 홍득원(洪得元), 수복(守僕) 문필만(文弼萬), 감관 임천복(林千福), 목수 안이경(安二京), 조설봉(趙雪逢) 등이 이건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학교등록』기록에 의하면 향교를 이건한지 40년만인 경종 3년(1723)에 다시 향교이건의 논의가 보인다. 우선 숙종 46년(1720) 4월 기사에 의하면, 현감 박종(朴琮)이 보고하기를 보수가 시급한 대성전 북벽을 먼저 보수하고, 이건은 재물을 모아 가을에 시행할 것을 청하였고, 이때 일단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향교 이건은 허락 받았지만 바로 시행되지 못했다. 이는 경종 3년(1723)에 경기 감사 이세최(李世最)가 4년전에 향교 이건을 허락받았는데 지금까지 실행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다시 장계를 올리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 때 이세최는 향교가 습기로 인해 거의 쓰러질 형편이며, 교생들이 풍수에 미혹되어 청하는 것과는 다르므로 이건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이때도 이건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1987년 현재의 위치 향교건물을 중건할 당시 발견된 상량문에 1684년 이건했다는 기록만이 있기 때문이다.

향교의 이건에 관한 잦은 논의나 기록을 통해, 당시 향교의 이건과 당쟁과의 관련성 내지는 다른 복잡한 사연이 연관되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보다 자세한 사정은 관련 자료의 부족으로 더 이상 확인할 수 없다. 한편 향교지에는 고종 25년(1888)부터의 도유사(都有司), 장의(掌儀) 등 명단을 적은 “경임록(經任錄)”과 “사마안(司馬案)”이 기록되어 있으나 원자료는 소실된 상태라고 한다.

최근의 중수상황으로는 1955년 향교 보수, 1970년 향교 보수, 1981년 지방문화재로 등재되면서 보수, 1987년 향교 외삼문 개축, 명륜당 해체 보수, 1994년 대성전 보수 등 유림의 성금과 국가의 보조금으로 꾸준한 중·보수 공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내삼문 등이 있으며, 향교입구에는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향교의 건물배치는 전형적인 전학후묘 형식이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명륜당은 팔작지붕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문헌목록]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양평의 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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