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지정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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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혜음원지
坡州 惠蔭院址
한자이름, 종목 및 지정번호, 지정일, 소재지, 시대로 구성된 표입니다.
지정구분 국가지정문화재
종목 및 지정번호 사적 제464호
명칭(한자) 파주 혜음원지 (坡州 惠蔭院址)
유형분류 유적건조물
지 정 일 2005-06-13
소 재 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혜음로454번길 18-55 지도로 보기
시 대 고려시대

파주 혜음원지(坡州 惠蔭院址)는 사적 제464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혜음로454번길 18-55이다.

혜음원(惠陰院)은 고려시대 봉성현(峯城縣 : 현재 경기도 파수지 광탄면 용미 4리)에 위치한 국립숙박기관이다. 수도인 개경과 중요 도시였던 남경(서울) 사이를 왕래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편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건립되었으며, 국왕의 행차를 위한 시설로 별원(행궁)도 축조되었다고 전한다.

혜음원에 관련된 문헌자료로는 『동문선』의 「혜음사신창기(惠陰寺新創記)」과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등이 있다. 「혜음사신창기」는 혜음원의 창건 배경 및 그 과정과 이에 공헌한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은 대체로 동문선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내용이 간추려 축약되었고 약간의 차이도 있다. 『여지도서』에는 ‘옛 터만 있다’라 하여 간단히 폐사된 상태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혜음원에 대한 여러 기록 중 『동문선』에 실려 있는「혜음사신창기」가 가장 자세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혜음원 창건 배경을 살펴보면, 혜음령은 개경에서 남경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서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지역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개경에서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곳이지만 지형이 험하고 주변에 민가도 없어서 통행에 불편이 큰 오지였다. 산짐승과 도적이 자주 출몰하여 위험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함께 모이고 무기를 가져야 고갯길을 넘을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지역이었다. 혜음원 이전에도 석사라는 절이 있었던 것 같지만 이미 없어지고 그 이름만 남아 있었다.

(자료출처 : 『문화재대관 사적 제1권(증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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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문화재대관 사적 제1권(증보판)』

1068년(문종 22) 남경에 신궁(新宮)이 세워지고 1099년(숙종 4)부터 남경 건설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어 1101년(숙종 6)에 본격적으로 남경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1102년(숙종 7) 8월에는 왕이 남경을 순행하여 머물다 돌아오기도 하였다. 숙종의 남경 순행 길은 개성~장단~파주(봉성현)~혜음령~고양~서울을 지나는 길이 활용되었다. 예종 때에도 왕의 남경 순행은 계속되었고 역시 파주에서 혜음령을 거쳐 고양을 지나는 길이 이용되었다. 국왕의 행차도 빈번해지면서 교통로의 안전을 확보하고 통행에 편리한 시설을 갖추는 것이 필요해지게 되었다.

파주에서 서울 사이 길은 산지와 계곡을 통과하기 때문에 고갯길이 많고 인적도 드물었다. 군사를 동반한 왕이나 관리들의 통행에는 큰 위험부담이 없지만 민간인이 통행하기에는 상당한 장애가 있었던 것이다. 국왕과 관리 뿐만 아니라 민간의 통행이 자유로워야 교통로로서의 역할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누군가는 민간의 통행을 위해서는 이곳에 교통로의 안전을 보장하고 통행자의 편리를 위한 시설을 세워야 했다. 하지만 새로 만드는데도 상당한 물자와 인력이 소요되지만 운영 과정에서도 지속적으로 자금과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바로 이소천이었다.

이소천은 왕의 명령으로 남쪽 지역을 시찰하고 돌아오면서 혜음령 주변의 사정을 알게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국왕의 명을 받고 백성들의 생활을 파악하기 위하여 시찰에 나섰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 혜음령의 통행 불편이 백성들의 생활에 커다란 폐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제시하게 된다. 결국 국가의 힘만으로는 해결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에서 민간의 힘을 빌리기 위한 방책을 제시하였다. 우선 원의 창건은 사찰의 도움을 받아서 하고 물론 원을 건설한 이후에도 운영도 사찰에서 맡아서 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유랑하는 백성들을 모아 주변에 마을을 만들어 정착시키어 치안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사실 고려시대에는 사찰에서 원을 설립하여 운영하는 곳이 많았다. 개경과 주변 지역은 물론이고 지방의 교통의 요지나 고갯길을 중심으로 사찰의 부속 시설로 원이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혜음원도 이러한 예를 따라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원은 단순한 숙박시설만이 아니라 물자와 정보가 교환되는 상업의 중심지였다. 사원이 창건되면 자연히 신도·상인·여행자 등이 몰려들어 마을도 형성되어 자연히 교통로에 대한 안전이 확보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혜음원을 창건하기 위하여 이소천은 먼저 묘향산에 있는 절을 찾아 갔는데 그 절이 어떤 절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개경 근처에도 절이 많은데 멀리 떨어진 묘향산까지 간 이유가 의문시되는데, 아마도 왕실과 절의 주지인 혜관 사이에 특별한 친분 관계가 있었다고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왕이 이소천에게 명하여 중 백여 명을 모집하여 그곳에 가서 초막을 지어 머물게 하였다’라 기록되어 있어서, 이소천이 혜관과 개인적인 친분보다 국왕의 명령을 수행하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혜관이 개입하면서 혜음원의 공사 준비 작업은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증여 등 기술자 16명을 선발하여 보냈는데 이들이 모두 승려들로 혜음원의 설계와 시공을 담당한 핵심 세력이었다. 1119년 8월에 국왕에게 혜음원 창건을 건의하였는데, 불과 6개월이 지난 1120년 2월부터 공사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만 2년이 지난 1122년 2월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

혜음원 창건의 일차적인 물자와 자금은 혜관이 마련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혜음원을 창건 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다른 곳에서도 경제적인 지원이 있었던 듯하다. 우선 이소천·혜관 등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나 국왕의 측근들도 동참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파주지역 및 인근 지역의 지방 세력이나 신도들도 대거 참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비구 응제에게 명하여 그 일을 주관하도록 하고 제자 민청을 부책임으로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질적으로 공사를 진행하고 감독한 것은 이소천이 아니었다.

응제나 민청 같은 승려들이었다. 또한 「혜음사신창기」에도 ‘응제는 일을 맡았다가 오래가지 못하고 민청이 이를 인계하여 끝까지 완성을 보았다. 그가 경비에 사용한 것은 위에서 내리신 것과 여러 신도들이 희사한 것이다. 그 이름과 목록을 갖추어 후면에 기록한 바와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불행하게도 후면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참여한 사람들을 알 수 없다.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실질적으로 공사의 책임을 맡아서 혜음원을 완공한 인물이 민청이었다. 민청은 응제의 제자라고 하는데 출신을 짐작할 수 없다. 혜관이 보낸 16명의 승려들 중에 한사람 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증여도 어떤 역할을 했던 것 같지만 구체적인 활동내역은 기록이 없다. 중간에 공사의책임자가 교체 되었던 것으로 보아 소요되는 자금과 물자의 조달이 일정하지 않았을 것이며, 다양한 경로를 통해 후원금이 들어왔을 가능성이 크다.

혜음원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기록에 의하면 법당을 비롯한 사찰 구역, 숙박과 취사시설을 중심으로 한 원(院)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찰은 불당과 승려들이 거주하는 승방 및 주방 창고 등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원은 여행자들이 쉴 수 있는 방과 휴게시설이 있었을 것이다. 사원(寺院)으로서 혜음원의 기본적인 시설들이 모두 갖추어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처음에는 행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의 행차에 대비하여 다시 별원을 축조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별원은 말 그대로 ‘별도의 원(院 : 담장을 두른 건물)’을 말하는 것으로 혜음원 한쪽에 국왕을 위한 별도의 행궁을 건축한 것을 말한다. 사실 숙종과 예종시대에는 국왕이 수차에 걸쳐서 남경을 행차하였다. 국왕의 행렬이 혜음원을 지나기 때문에 행궁을 건설할 필요성이 제기된 듯하다. 이것은 처음 혜음원을 만들 때는 계획된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혜음원이 완공된 후 그 필요성이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 1122년 4월 인종(1109~1146)이 새로 즉위하였는데, 그 이후에 별원이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실지 인종이나 그 이후의 고려의 왕들이 혜음원에 다녀갔는지는 기록이 없어 분명하지 않다.

1144년은 왕실의 지원으로 혜음원이 다시 크게 보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혜음사신창기」는 처음 완성된 1122년에 작성된 것이 아니고 이보다 22년 늦은 1144년에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1144년 경에 혜음원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아마도 1144년경부터 왕실에서 혜음원의 운영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대대적인 보수가 이루어지고 왕실에서 소용되는 집기도 새로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기념하여 당대 최고의 문인인 김부식이 「혜음사신창기」를 작성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혜음원에 대한 발굴조사는 2008년까지 모두 5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혜음원의 중심 지역은 대부분 조사가 완료되었다. 하지만 아직 주변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남아 있어서 정확한 규모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혜음원의 구조는 남한지역에서는 출토된 예가 없는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고려시대 중기의 독특한 건축 양식을 가지고 있는데 특히 고려의 궁궐이었던 만월대와 입지나 구조가 비슷하여 주목된다. 혜음원은 크게 두 개의 건물군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이를 편의상 원지 일곽과 행궁지 일곽으로 구분할 수 있다. 원지를 먼저 만들고 나중에 행궁(별원)을 만들었다는 「혜음사신창기」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현재까지 조사된 것에 의하면 혜음원은 경사면을 계단식으로 쌓아서 모두 9단의 건물터를 마련하고 일직선으로 연결된 문터를 중심으로 좌우로 대칭을 이루면서 건물을 축조하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행궁지는 혜음원의 동남쪽 모서리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혜음원에서 가장 후미진 곳에 해당된다. 사방이 높은 담으로 막혀져 폐쇄된 공간이다. 동쪽 끝에 왕이 기거할 수 있는 정전이 있고 남쪽 끝에는 연회나 모임을 할 수 있는 큰 누각 건물이 있다. 정전에서 누각까지 문들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중심을 이룬다. 그 좌우로 동일한 형태와 규모를 가진 건물이 대칭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군데군데 연못이 있고 연못을 서로 잇는 수로를 마련하여 항시 물이 흐르도록 하였다. 남쪽 담장과 축대아래에는 큰 수로를 조성하고 각종 조경시설을 마련하였다. 정전의 뒤에도 계단식으로 조성된 후원이 있고 그 중앙에는 계단이 있고 계단 끝에는 작은 문을 마련하여 외부로 통할 수 있게 하였다. 이곳은 국왕이 행차 시 국왕과 신료들이 머무는 공간으로 추정된다.

행궁지는 남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와 구조를 가진 건물들로 조선시대의 궁궐과도 차이가 있다. 각 건물은 기둥을 받치는 초석 아래에 초반이라고 부르는 잘 다듬은 돌을 놓아 격식 있게 지었다. 건물의 규모가 크고 기둥과 기둥 사이의 간격도 넓어서 내부 공간이 일반 건물에 비하여 월등히 크다. 축대나 계단에 사용된 돌도 고급 화강암 자재를 잘 다듬은 것들이었다. 특이한 것은 온돌을 시설하지 않았고 난방을 위해 벽난로와 유사한 시설을 설치하였다. 아마도 침대와 탁자 등을 놓고 입식생활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왕실과 귀족들은 온돌 보다 입식 생활을 즐겼던 것을 알 수 있다.

정전 주변에서는 용두·치미·취두·잡상 등 고급 건물에서 사용되었던 특수기와들이 출토되었다. 또한 혜음원이라 새겨진 막새기와가 대량으로 출토되기도 하였다. 건물들은 대부분 불에 타서 무너져 내려는데 무너진 부분의 처마선을 따라서 암막새와 수막새 기와들이 출토되었다. 건물이 불에 타서 무너진 방향도 알 수 있었다. 원지는 서쪽의 정문에서부터 가장 동쪽에 위치한 대형 건물터를 연결하는 선이 중심이다. 이 축선을 따라서 각 단마다 문을 설치하고 그 좌우로는 행궁과 마찬가지로 좌우 대칭을 이루도록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원지의 가장 동쪽 끝에 위치한 대형 건물터 뒤에는 사각형의 연못이 있고 연못 뒤에는 후원과 담장이 있다. 연못 중앙에 징검다리가 있어서 후원으로 갈 수 있도록 하였다. 담장 모서리에는 외부에서 연못으로 물이 흘러 들어오도록 수로를 마련하였다. 연못에 고인 물은 행궁지 축대를 따라 만들어진 수로를 통해 빠져나가 행궁지의연못으로 흘러가도록 하였다.

원지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은 앞에서 말한 동쪽 끝부분의 대형건물터인데 이 건물터가 어떤 용도의 것이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건물의 규모나 형태도행궁지와 차이가 없고 기단은 청석을 깔아서 고급스럽게 만들었다. 이 건물터 앞의 마당도 청석으로 포장이 되어 있다. 행궁 정전을 제외하면 혜음원에서 가장 격식 있는 건물에 속한다. 건물터의 대부분이 경작지를 조성하면서 파괴되었기 때문에 건물의 용도를 확인할 수 있는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다만 남쪽의 일부 기단과 초석이 남아 있어서 그 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건물터의 규모, 위치, 형태, 장식 수법 등으로 보아 불당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불당 뒤에 연못을 배치한 예가 없어서 섣불리 판단하기는 어렵다. 이 건물터북쪽에서 출토된 건물터에서는 다량의 청자 편이나 생활용구들이 출토되었다. 혜음원의 생활용 집기들이 대부분 이 곳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 건물이 「혜음사신창기」에 기록된 주방일 가능성이 있다. 그 북쪽은 작은 개울을 두고 축대와 담장을 쌓아 마감하였다. 담장 외부로 우물이 있는데 지금도 수량이 풍부하다.

원지의 건물들은 두 칸 마다 벽난로와 비슷한 난방시설을 설치하였다. 두 칸이 하나의 방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원지도 행궁지와 마찬가지로 건물과 건물 사이에 수로를 조성하고 건물터 중간으로도 암거(숨겨진 수로)를 마련하여 상시 물이 흐르도록 하였다. 또한 수로 중간에 물을 이용한 조경시설을 만들어 방안에서 물소리가 들리도록 하였다. 원지의 북쪽과 서쪽은 수해와 경작지 조성으로 대부분 파괴되어 정확한 구조를 파악하기 어렵다. 행궁지 대형 누각 건물터 서쪽은 여러 번에 걸쳐서 개축된 건물터가 출토되었다.

원래 건물터였던 곳을 연못과 수로를 만들기 위해서 건물을 헐고 그 서쪽에 지반을 높여서 다시 건물을 지었다. 이 건물터에서는 조선시대 백자가 출토되었는데 가장 늦게까지 활용되었던 건물터로 추정된다. 혜음원의 주문지에서는 문확석과 문지방돌이 출토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통행하였던 것을 보여주듯이 돌이 닳아 파여 있었다. 주문지 중문까지는 양 옆에 담장을 쌓은 흔적이 노출되었다.

남쪽담장에 잇대어 커다란 연못이 있었고 그 가운데는 누각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혜음원의 중앙부를 관통하는 수로가 모두 이 연못으로 모이는 것이 아닌가 한다. 여기에 모인 물은 다시 주문지 남쪽의 수로를 통하여 외부로 흘러나가도록 하였다. 주문지 외부에도 연못이나 출입과 관련된 도로가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 밝혀진 혜음원의 구조는 이곳이 산지임에도 불구하고 평지의 궁궐이나 사원처럼 정연하게 조성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혜음원이 아주 치밀한 계획 속에서 건설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건물의 형태나 규모도 다른데 비하여 크고 장엄하며 조경도 잘 이루어져 있었다. 국왕의 행궁에 걸맞게 아주 격식을 잘 차려서 지은 건물이었다.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도 최고급품에 속하는 것들이어서 왕실에서 직접 집기를 하사하였다는 「혜음사신창기」의 기록과도 일치 한다. 따라서 혜음원은 개성의 고려 궁궐터 만월대와 더불어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건물터라 할 수 있다. 또한 고려 전성기 왕실과 귀족 생활을 엿 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발굴조사 결과 혜음원은 화재에 의하여 전체 건물이 한 번에 없어졌던 것으로 파악된다. 혜음원지 전체에 걸쳐서 불타서 퇴적된 층이 약 20~30㎝ 정도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이 혜음원 전체가 일시에 화재로 사라졌던 것은 실수로 인한 것이기 보다 누군가 일부러 불을 질렀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중기 이전의 건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봉정사 극락전 등은 모두 고려 후기의 건물터이다. 이웃나라인 일본에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해당되는 건물터가 존재하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이는 고려시대 전쟁의 참화를 겪으면서 대부분 불에 타 없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고려 중기이전의 건물들은 몽골침략기에 대부분 불타 없어졌다. 혜음원도 몽골군의 진군로에 있었기 때문에 몽골군에 의하여 불타 없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우선 1258년(고종 25) 몽굴군이 개경에 주둔하면서 혜음원 주변 교하와 봉성 일대를 약탈하고 양과 말을 놓아 먹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당시 혜음원이 있었던 봉성현 일대는 몽골군의 약탈과 방화로 거의 폐허가 되었다. 이 때 혜음원도 모두 소실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혜음원에서 출토되는 유물이 모두 대부분 13세기 이전의 것이라는 점을 보아도 몽골 침입기에 혜음원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고려는 몽골의 부마국이 되었고 왕실의 재정도 약화되어 불에 탄 혜음원을 다시 재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만 기록에는 고려 후기나 조선 초에도 혜음원에 대한 기록이 보이고 있어서 이때까지는 명맥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 결과 15세기경의 건물터 흔적은 행궁 정전 일대나 행궁 누각지 서쪽 등 일부 지역에서만 보이고 있다. 원래의 혜음원에 1/10도 안될 정도로 축소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258년경에 불타 없어진 후 나중에 일부 건물만 보수되어 원으로 이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혜음원에 대한 발굴조사는 아직 완료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는 향후 발굴조사가 진행되면서 바뀔 수 있다. 아직 불당지와 원지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고 현재 원지로 추정되는 곳에 불당과 승방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발굴이 완료되지 않은 서쪽 부분에서도 또 다른 유적이 출토될 가능성이 있다. 혜음원 북쪽 능선으로 현재 군부대의 사격장이 있는 곳에서도 혜음원지에서 사용된 기와와 동일한 기와들이 다량 출토되고 있어서 여기에도 혜음원과 관련된 유적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같이 혜음원에 대한 의문은 아직 많이 남아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조사 결과로도 「혜음원신창기」의 기록이 정확하다는 사실은 충분히 증명되었고 남한에서는 유일한 고려시대 행궁지로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는 것도 분명하다. 향후혜음원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고려시대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문헌목록]
『경기문화재총람-국가지정편(1~3)』
『파주역사 : 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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