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지정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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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 미사리 유적
河南 渼沙里 遺蹟
한자이름, 종목 및 지정번호, 지정일, 소재지, 시대로 구성된 표입니다.
지정구분 국가지정문화재
종목 및 지정번호 사적 제269호
명칭(한자) 하남 미사리 유적 (河南 渼沙里 遺蹟)
유형분류 유적건조물
지 정 일 1979-10-25
소 재 지 경기도 하남시 미사동 557번지 외 지도로 보기
시 대 선사시대

하남 미사리 유적(河南 渼沙里 遺蹟)은 사적 제269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하남시 미사동 557번지 외 이다.

이 유적은 1960년에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에는 신석기시대의 유물만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여러 차례에 걸친 발굴 조사를 통하여 신석기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유물과 유구가 확인되었다. 따라서 미사동 유적은 선사시대부터 역사시대에 걸친 한강 하류 지역의 고대 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신석기시대의 집터와 화덕자리 그리고 많은 종류의 석기와 빗살무늬토기가 발굴되었다. 이 곳의 신석기시대 문화 성격은 미사동보다 약간 하류 쪽에 있는 암사동 유적과 여러 가지 공통점이 있는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청동기시대 지층에서는 집터와 화덕자리를 비롯하여 다양한 석기와 민토기, 붉은간그릇, 검은간그릇, 구멍무늬토기, 덧띠토기 등이 나왔다. 삼한시대의 지층에서는 움집과 지상 가옥의 집자리, 부뚜막 시설 등이 확인되어 고대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여러 종류의 철제 유물, 토기, 석기, 옥제품 등과 함께 유리구슬을 만드는 데 쓰인 거푸집과 1세기 무렵으로 보이는 청동거울도 이 시기의 문화층에서 나왔다. 미사동 유적에서 드러난 백제시대 경작지(밭)의 발굴 성과는 당시의 사회 경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 광주미사리선사유적→하남 미사리 유적 명칭변경(2011.07.28. 문화재청 고시)

(자료출처 : 『경기문화재총람-국가지정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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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하남문화원

미사동 선사유적은 우리나라에서 신석기, 청동기, 백제시대까지의 오랜 역사문화의 유적이 발견된 곳으로 일본의 요시노가리 유적처럼 각기 다른 시대의 유적층이 한곳에서 발견된 곳으로 우리나라의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아주 중요한 유적이다. 그러나 지금은 훼손을 막기위하여 유적지 전체를 흙으로 2m이상을 덮어놓은 상태이다.

미사동 선사유적은 암사동 선사유적과 같이 공동문화권으로 발전된 선사시대의 유적으로서 발굴된 유물또한 암사동 유물과 거의 같지만 특이할 만한 것은 백제시대의 밭을 일구었던 흔적과 신석기 이후의 집터37기가 발굴 되므로서 고대서부터 아주 오랫동안 사람이 거주해 왔던 것을 미사동유적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또한 덕풍동 유적지에서 발굴된 청동기 시대의 유물을 통하여 우리하남지역이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으며, 현재의 하남 미사동과 암사동을 포함한 강동 송파지역은 선사시대의 오늘날의 도시와 같은 많은 인구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사동선사유적은 1962년에 김원룡 박사에 의해 발견되었고 1980년대에 지표조사를 시작하였으며, 한강종합개발사업을 펼치면서 한강하폭을 늘려야 되는 이유로 1987년부터 서울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서울시내 4개 대학이 본격적으로 합동 발굴하였다. 현재 지표로부터 7개의 자연층위로 이루어졌는데 삼국시대 전기 층, 청동기시대 층, 신석기시대 층으로 구분된다.

유적 아래 두층이 신석기시대 층이고 그 위로 청동기시대와 삼국시대 문화층이 사이층을 두고 각각 놓여 있다. 층위에 따라 질그릇의 모양새가 달라 미사리 유적보다 조금 하류에 있는 암사동 유적과 함께 우리나라 중서부지방 신석기시대의 질그릇 갖춤새와 발달과정을 아는데 중요한 유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청동기 시대층에서는 여러 점의 무문토기와 돌도끼, 돌끌, 돌그물추, 그리고 당시의 집터가 확인되었다. 신석기시대층은 주거지와 빗살무늬토기, 그물추, 화살촉, 돌도끼를 비롯한 생활도구와 불에 탄 도토리가 채집되었으며, 유구로는 움집터 3기 외에 저장구덩, 대소형 야외 화덕자리 다수 및 방형주구 형태의 미상유구가 1기 검출되었다.

삼국시대의 백제문화층에서는 고랑과 이랑이 확연한 밭이 조사되었고, 더불어 이와 관련된 창고용 고상식 건물지와 저장구덩이가 확인되어 이미 이 시기에는 원시적인 농경에서 벗어나 철제 농기구의 발달로 효율적인 토지이용 및 농업기술의 발전에 따른 농경시설을 갖추었음이 확인되어 이에 대한 구조를 유출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미사리 유적은 각 시기별 유적의 변천과정이 비교적 명확하고 또한 유구간의 중복관계가 상당히 심한 편이어서 동일 층위 내에서의 선후관계를 밝히기에도 매우 용이하기 때문에 한국 중부 지역 선사시대의 변천상 및 집락의 형성과 소멸 등 당시의 전반적인 사회상을 살피는 데 표준유적이 되었다. 신석기시대 유구로는 움집터 3기 외에 저장구덩, 대소형 야외 화덕자리 다수 및 방형주구 형태의 미상유구가 1기 발견되었다.
[문헌목록]
『경기문화재대관-국가지정편』
『한성백제 고고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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