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문화재

스크랩하기
인쇄하기
즐겨찾기
퍼가기
카카오톡으로 퍼가기 페이스북으로 퍼가기
적용
남한산성 행궁
南漢山城 行宮
한자이름, 종목 및 지정번호, 지정일, 소재지, 시대로 구성된 표입니다.
지정구분 국가지정문화재
종목 및 지정번호 사적 제480호
명칭(한자) 남한산성 행궁 (南漢山城 行宮)
유형분류 유적건조물
지 정 일 2007-06-08
소 재 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남한산성로 784-29, 외 일원 (산성리) 지도로 보기
시 대 조선시대

남한산성 행궁(南漢山城 行宮)은 사적 제480호로 소재지는 경기 광주시 중부면 남한산성로 784-29 일대이다.

남한산성행궁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위치해 있다. 남한산성 내에 왕의 행행을 위해 행궁을 지은 것은 1624년(인조 2) 이곳에 산성을 축조하면서이다. 남한산성이 처음 축조된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백제 온조왕 대에 성을 쌓았다는 설이 전하고 있으며 신라 문무왕 때 이곳에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확인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이곳에 일장산성(日長山城)이 있다는 기록도 보인다. 현재의 산성은 조선 인조 때 와서 후금세력의 위협이 커지고 이괄의 난을 겪으면서 착수되었다. 1624년에 와서 왕은 총융사(摠戎使) 이서(橷曙)에게 명하여 산성을 쌓도록 하고 광주부 읍치를 산성내로 옮기도록 했다. 이에 따라 광주부의 객사, 관아 등이 모두 성내로 이전되었으며 이 때 객사 뒤편에 행궁을 지었다.

1636년(인조 14)에 국호를 청(淸)으로 고친 후금(後榨)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했으며 왕은 세자와 모든 관료를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하여 행궁에 머물며 항전하였다. 그러나 추위와 굶주림으로 항복하고 47일 만에 산성에서 나왔다. 이 후에도 남한산성은 1917년 광주부 읍치를 경안으로 이전할 때까지 읍치로 있었으며 행궁에는 역대 임금들이 유숙하였다. 1688년(숙종 14)에 숙종이 행궁에 머물고 1730년(영조 6)에는 영조가, 1779년(정조 3)에는 정조가 효종대왕릉인 여주 영릉에 참배하러 가면서 오고 가는 길에 남한행궁에서 유숙(橣宿)하였으며 1862년(철종 13)과 1867년(고종 4)에는 철종과 고종이 인근 헌릉과 인릉에 참배하면서 유숙하였다.

남한산성은 동서로 긴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성내는 서쪽에서부터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동쪽으로 물길이 흘러 나가는 형세를 하고 있다. 행궁은 서쪽의 약간 높은 곳에 자리 잡고 동향해서 자리 잡았다. 행궁 주변에는 객관인 인화관(仁和館)을 비롯한 관아건물들이 남쪽 낮은 지역과 동쪽에 놓여 있었다.
인조 때 행궁이 처음 지어지고 나서 주변에 여러 건물이 증축되었는데, 1688년(숙종 14)에는 행궁 후방에 사당인 재덕당이 세워지고 1711년(숙종 37)에는 유사시를 대비한 좌전(종묘)와 우실(사직)이 세워졌다. 좌전은 역대 임금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지은 것인데, 정전과 영녕전은 각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해서 정전에는 종묘 정전과 같은 신위를 영녕전은 정전에 들지 못하는 신위를 모시되 1칸에 세 신위를 합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좌전에는 실제 신위를 모시지는 않았다. 우실은 남문 안쪽에 두었다. 1798년(정조 22)에는 바깥 대문인 한남루가 세워지고 순조대에 정자와 별당인 완대정(1805년)·우희정(1813년)·좌승당(1817년)·일장각(1829년)이 세워졌다. 이들 정자는 행궁 북쪽 개울물 건너편에 집중되어 있었다.

남한행궁이 처음 지어졌을 때 건물 규모는 잘 알 수 없다. 1760년경에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행궁 전체가 231칸이라고 하였으며 좌전이 29칸, 우실 4칸이라고 하였다. 1846년(헌종 12)에 편찬된 『重訂南漢志(중정남한지)』에 당시 규모가 나와 있는데, 상궐은 좌우방과 가운데 대청 및 익랑을 포함해서 70여 칸이라고 하였다. 19세기의 『광주부읍지』에는 상궐 72칸 반·하궐 154칸·재덕당 7칸·좌승당 14칸·일장각 8칸·한남루 3칸에 좌정이 26칸·우실이 4칸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20세기 초의 상궐과 하궐 사진에 의하면 두 건물은 모두 정면 7칸의 익공식 건물이며 여러 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세워지고 중앙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을 두고 사면에 퇴가 감싸는 형태를 취한 모습이다. 그 외관은 궁궐의 침전과 유사하다. 대문인 한남루도 사진이 전하는데, 장초석 위에 2층 구조를 이룬 3칸의 문루 형식을 취하고 있다.

1917년 광주부 읍치가 이전되면서 행궁과 관아 건물은 용도를 잃게 되었고 많은 건물이 철거되어 새 읍치로 이건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 행궁지는 전면 상당 부분이 사유지화하여 소규모 호텔을 비롯한 민간 건물이 들어섰다.

1990년대에 들어와 국방유적으로써 남한산성의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경기도에서 행궁터의 정비와 행궁 복원방침이 세워졌다. 이에 따라 사유지를 매입하고 기존 건물을 철거하게 되었다. 행궁지의 발굴은 1998년 시굴조사를 시작으로 이 해부터 2008년까지 8차에 걸친 조사가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에 의해 이루어졌다. 발굴조사를 통해서 행궁의 유적 전모가 드러났는데 건물터에 호텔이나 음식점 건물이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유적이 잘 드러났다. 상궐은 초석들이 온전히 노출되고 좌우 온돌방 구들이 잘 남아 있었다.

발굴결과 상궐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이고 중앙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정면 2칸의 온돌방이 대칭으로 놓이고 사방은 툇마루가 감싸는 형태이다. 이런 평면은 창경궁의 통명전 이나 환경전과 유사한 것이어서 상궐건물이 궁궐 침전을 모범으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사당인 재덕당은 정면 3칸에 측면 1칸 반으로, 전면 퇴칸을 개방한 전형적인 사당 형식을 취하였다. 좌전 및 주변 행각들도 초석이 대부분 그래도 노출되었다. 좌전은 정전과 영녕전이 각각 독립된 울타리 안에 놓이고 규모는 모두 정면 5칸, 측면 3칸이었다. 하궐 일대는 선대 연못지 위에 행각이 들어서는 등 유적이 중첩된 부분도 있고 교란 된 곳도 있었으나 전체 건물 규모를 추정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의 충분한 유구가 확인되었다. 하궐의 중심 건물 역시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궁궐 침전 평면 형식을 그대로 따랐다. 한남루지와 중문지 및 중문 좌우의 행랑 등이 확인되고 전돌이 깔린 어도 일부도 노출되었다.

특히 하궐지의 초석 하부 약1.5m 아래에서 통일신라시대 대형 건물터가 노출되고 당시에 제작된 초대형 기와가 다량 출토된 것은 예상치 못한 큰 성과였다. 통일신라 건물터는 정면 14칸, 측면 4칸의 대형 평면에다 기둥과 벽체가 특수한 구조여서 주목되는 것이었다. 후면의 15개 기둥 열에는 바닥이 한단 낮은 외부 기둥열이 있고 안쪽에는 두께 1m의 흙벽이 올라가고 그 안에 목조 기둥이 세워진 구조였다. 전면 기둥열은 거의 멸실되어 확인이 안 되었다. 이런 구조는 창문을 두지 않은 창고와 같은 건물에서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건물을 신라 때의 군창용도로 지은 것으로 추정하게 하였다. 함께 노출된 기와는 장변 길이가 64㎝에 달하고 기와 하나의 무게가 무려 20㎏이 넘는 초대형이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보고 된 기와 중에는 가장 크고 무거운 것이었다. 이런 기와가 건물터와 함께 건물터 바깥 한군데에 나란히 정렬된 상태로 약 350편이 출토되었다. 나중에 사용하려고 저장해 두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남한산성은 유사시를 대비해서 도성 남쪽에 마련한 보장지처, 즉 난을 피하기 위한 곳으로 지형이 험준하고 성내가 넓어 장기간 군사들이나 백성이 머물 수 있는 곳이었다. 조선시대 도성 주변에 축조한 산성가운데는 가장 규모도 크고 성내 시설도 다양한 것이었다. 남한산성의 핵심이 되는 곳이 행궁이었다. 행궁의 중심 시설인 상궐과 하궐은 궁궐 침전의 형식을 따라 조성되었으며 주변에는 종묘와 사직이 갖추어지고 여타의 많은 부속 시설을 마련한 조선왕조의 대표적 행궁의 하나이다. 장기간의 발굴조사를 통해서 행궁시설 대부분의 유구가 확인되었으며 특히 통일신라시대 창고지로 추정되는 건물이 확인되어 행궁터가 신라 때부터 군사적인 용도로 중요하게 쓰였음이 확인되었다.

남한행궁은 2001년부터 사유지를 매입하고 건물터를 정비하고 중요 시설을 복원하는 작업이 시작되어 2010년 일단락을 지었다. 건물은 상궐과 하궐 및 재덕당·좌전·좌승당과 일장각 및 주변의 부속행각을 모두 복원하였으며 한남루와 연못 등도 복원되었다. 특히 하궐 건물터 아래서 출토된 신라시대 창고 추정 건물터에 대해서는 유구의 일부분을 노출시키기로 하여 하궐 북행각 위치에 신라시대 건물터 일부를 노출해 놓았다. 또한 신라시대 대형 기와가 저장되어 있던 부분도 본래 위치에 재현해 두었다.

남한산성은 2014년 6월 22일 제38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11번째이며, 경기도에서는 수원 화성에 이어 두 번째이다.

(자료출처 : 『문화재대관 사적 제1권(증보판)』)

[문헌목록]
『남한산성』
『산성의 풍경 역사의 기억-남한산성행궁 복원 기념 특별기획전』
『문화재안내문안집2』
※ 문화재를 보고 묘사하는 단어, 떠오르는 인상이나 느낌 등을 한 두 단어로 입력해보세요.
※ 여러분과 같거나 다른 생각들을 확인해보세요.
이전 다음 광주
공공누리 제4유형: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경기문화재단이 보유한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작품 사진의 경우 작품저작권자의 권리에 의해 보호를 받기 때문에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으니 문의 후 이용 바랍니다.

콘텐츠 정보에 만족하십니까?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