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지정 문화재

스크랩하기
인쇄하기
즐겨찾기
퍼가기
카카오톡으로 퍼가기 페이스북으로 퍼가기
수원 팔달문
水原 八達門
한자이름, 종목 및 지정번호, 지정일, 소재지, 시대로 구성된 표입니다.
지정구분 국가지정문화재
종목 및 지정번호 보물 제402호
명칭(한자) 수원 팔달문 (水原 八達門)
유형분류 유적건조물
지 정 일 1964-09-03
소 재 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780(팔달로2가 138) 지도로 보기
시 대 조선시대

수원 팔달문(水原 八達門)은 보물 제402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780이다.

화성은 1789년(정조 13) 생부 장조(莊祖,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 화산아래로 옮기고 현릉원이라 하였는데, 이때 이곳에 있었던 기존의 읍을 옮기면서 새로 조성한 읍의 성곽이다. 1793년(정조 17)에 새로이 조성된 읍을 화성(華城)이라 명명하고, 축성공사는 정보 17년 12월에 준비되어 1794년(정조 18) 2월에 시작 2년 반만인 1796년(정조 20)에 완공되었다.

정조는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를 발간하게 하여 당시 공사에 적용된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의 내용을 640여장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정리하게 하였는데, 도면이 수록된 이 서책은 18세기의 새로운 도시와 건축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화성은 둘레 약 6,600보, 성벽높이 약 2장 5척으로 하고 재료는 돌로 하고, 성벽 주변에는 호를 파는데, 깊이 약 1장 5척, 넓지 7장, 바닥은 3장으로 하였다.

또한 방어시설로는 옹성, 포루, 현안, 누조 등이 필요한데, 화성을 설계한 정약용은 포루 7, 적루 4, 적대 9, 포루 2, 노대 1, 각성 7개소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화성의 설계에는 정조와 밀접한 실학파들이 관계를 하였는데, 그들은 성역과 관련하여 산성을 읍성으로 대체하여 읍에서의 경제력을 주장하고, 기계의 사용으로 경제적인 공사를 수행하며, 만들기 편하고 수명이 오래가는 재료의 사용으로 성역공사의 실용적인 경제성을 주장하였다.

현재의 성은 1975년부터 복원한 것으로 현재 남문인 팔달문, 북문인 장안문, 서문인 화서문, 동문인 창룡문, 4개소의 암문, 동장대, 서장대, 수문, 공심돈, 4개소의 각루, 포루 5개소, 치성 10개소, 적대 2개소가 있다. 화성에서 보이고 있는 옹성과 공심돈 및 치성 등의 사용은 이전의 성들에서 보이는 수비위주의 성곽건축이 아닌 수비와 공격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다목적의 성곽임을 보여주고 있다.

팔달문은 화성의 남문으로 북쪽에는 이와 똑같은 북문인 장안문이 있는데, 6․25 전쟁 때 전화를 입어 다시 복원하였다. 팔달문은 전쟁 중에 전화를 입지 않아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일반적인 성곽의 석축과 같이 화강암 석축으로 홍여문을 두었고, 그 위에 중층의 문루를 세웠는데, 주위의 4면에는 여장(女墻)을 돌리고, 앞면에는 서울의 동대문과 같이 반원형의 옹성(甕城)을 두어 2중의 방어적 성격이 짙게 쌓았는데, 옹성의 중앙에는 문루홍예석과 축을 맞추어 홍예를 설치하고 그 위에 단을 높여 외부로 5개의 원형구멍을 낸 오성지(五星池)를 설치하고 정면 1칸, 측면 1칸의 누각을 설치하였다. 여장은 전벽돌로 화성에서 최초로 사용한 벽돌시공이고, 옹성 또한 전벽돌로 시공하영 옹성의 곡선이 매우 부드럽고 아름답게 보이게 된다. 이러한 벽돌의 사용은 시공하기가 쉽고 용이하고 보수도 용이하여 화성전역에 걸쳐 사용하게 된다.

문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기부(基部)위에 자연석 주초가 놓이고 원형기둥이 그 위에 올려져 있고, 내부에는 중앙에 고주를 1줄로 배치하고 아래, 위층의 대들보는 모두 이 고주에 연결되어 있다. 위층의 외부기둥은 모두 아래층의 대들보 위에 세워지게 되는데 이러한 결구는 서울의 남대문과 동대문에서도 보이고 있는 형식이다. 공포는 다포형식으로 아래층은 내3출목, 외2출목이고 2층은 내외가 모두 3출목으로 되어 있다. 다른 건축에 비해 주두가 납작한 것이 특징이며, 살미는 하부의 살미첨차는 앙서형으로 쇠서가 매우 강하게 표현되었고, 상부의 수서는 익공형으로 그 표현 또한 매우 강하게 초각하였다. 또한 귀평방 머리위에 얹어 귀의 포를 받치는 짧은 부재인 이방(고삽)으로 처마의 높이를 조절하였다는 것이 다른 특징으로 나타나 있다.

천장은 서까래가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구성하였고, 고주 위에는 화반을 얹어 마루보의 한복판을 받치고 있다. 대들보와 마루보위에 세운 대공들을 연결하여 도리와 병행하는 튼창방을 결구하는 것은 문루건축에서 보이는 하나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지붕은 우진각지붕으로 중요한 대문에 사용한 지붕인데, 각 마루에 양성을 바루고 잡상을 올려놓아 궁궐건축으로서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문의 좌우로는 성벽이 연결되어 있으나 도로의 개설로 인하여 성벽이 없어지고 좌우의 적대(敵臺)도 없어져서 지금의 성문만이 남아있다.
팔달문은 1920~1930년에 수리가 있었고, 1975년에 화성을 수리하면서 옹성을 수리하였다. 또한 1993년에 옹성의 부분적인 수리가 있었다.

수원 화성은 1997년 12월 4일 제21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자료출처 : 『문화재대관(보물편·목조, 개정판)』)

[문헌목록]
『수원 화성 팔달문』
『경기문화재대관-국가지정편』
『문화재안내문안집. 1』
※ 문화재를 보고 묘사하는 단어, 떠오르는 인상이나 느낌 등을 한 두 단어로 입력해보세요.
※ 여러분과 같거나 다른 생각들을 확인해보세요.
이전 다음 국가지정 문화재
공공누리 제4유형: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경기문화재단이 보유한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작품 사진의 경우 작품저작권자의 권리에 의해 보호를 받기 때문에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으니 문의 후 이용 바랍니다.

콘텐츠 정보에 만족하십니까?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