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지정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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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서문
水原 華西門
한자이름, 종목 및 지정번호, 지정일, 소재지, 시대로 구성된 표입니다.
지정구분 국가지정문화재
종목 및 지정번호 보물 제403호
명칭(한자) 수원 화서문 (水原 華西門)
유형분류 유적건조물
지 정 일 1964-09-03
소 재 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334번지 지도로 보기
시 대 조선시대

수원 화서문(水原 華西門)은 보물 제403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334번지이다.

화성은 1789년(정조 13) 생부 장조(莊祖,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 화산아래로 옮기고 현릉원이라 하였는데, 이때 이곳에 있었던 기존의 읍을 옮기면서 새로 조성한 읍의 성곽이다. 1793년(정조 17)에 새로이 조성된 읍을 화성(華城)이라 명명하고, 축성공사는 정보 17년 12월에 준비되어 1794년(정조 18) 2월에 시작 2년 반만인 1796년(정조 20)에 완공되었다.

정조는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를 발간하게 하여 당시 공사에 적용된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의 내용을 640여장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정리하게 하였는데, 도면이 수록된 이 서책은 18세기의 새로운 도시와 건축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화성은 둘레 약 6,600보, 성벽높이 약 2장 5척으로 하고 재료는 돌로 하고, 성벽 주변에는 호를 파는데, 깊이 약 1장 5척, 넓지 7장, 바닥은 3장으로 하였다. 또한 방어시설로는 옹성, 포루, 현안, 누조 등이 필요한데, 화성을 설계한 정약용은 포루 7, 적루 4, 적대 9, 포루 2, 노대 1, 각성 7개소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화성의 설계에는 정조와 밀접한 실학파들이 관계를 하였는데, 그들은 성역과 관련하여 산성을 읍성으로 대체하여 읍에서의 경제력을 주장하고, 기계의 사용으로 경제적인 공사를 수행하며, 만들기 편하고 수명이 오래가는 재료의 사용으로 성역공사의 실용적인 경제성을 주장하였다.

현재의 성은 1975년부터 복원한 것으로 현재 남문인 팔달문, 북문인 장안문, 서문인 화서문, 동문인 창룡문, 4개소의 암문, 동장대, 서장대, 수문, 공심돈, 4개소의 각루, 포루 5개소, 치성 10개소, 적대 2개소가 있다. 화성에서 보이고 있는 옹성과 공심돈 및 치성 등의 사용은 이전의 성들에서 보이는 수비위주의 성곽건축이 아닌 수비와 공격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다목적의 성곽임을 보여주고 있다.

화서문은 화성의 서대문으로 문의 제반시설과 규모는 동문인 창룡문과 거의 같은 구조로 되어 있으며 옹성 또한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좌우성벽에 연결되는 돌로 된 기부(基部)에 홍예문을 두어 출입을 하게 하였고, 그 위에 1층 누각으로 구성하였다. 정문 앞에는 반월형의 전벽돌로 지은 옹성(甕城)이 있는데 그 모습은 팔달문과는 상이하다. 팔달문의 경우는 전면이 옹성이고 그 중앙에 홍예를 두어 2중문의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화서문의 경우는 문에서 바깥쪽으로 좌측에 옹성의 일부를 비워두어 성문으로 들어갈 때 오른쪽으로 돌아서 들어가게끔 만든 옹성구조이다. 이러한 구조는 서울 동대문의 구조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옹성은 현안(懸眼) 3개와 여장에 네모꼴의 총혈(銃穴) 19개, 사혈(射穴) 6개가 뚫려있다. 문루는 기부 양측에 내부계단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으며, 석축위에는 사방에 전벽돌로 쌓은 평여장을 돌리고, 여장 밑 기부의 전후면 상부에는 석루조를 2개씩 설치하고 있다. 그리고 양측계단과 연결되는 곳에는 누각으로 통하는 일각문형식의 협문이 각 1개소씩 설치되어 있다.

건축은 전통적인 이익공(二翼工)형식으로 창방에서 나온 초익공과 그 상의 이익공으로 외목도리를 받치고 주심의 익공사이 창방위에는 화반을 두어 튼창방을 받치게 하였다. 대들보에는 팔작지붕의 특성으로 보이는 좌우에서 대들보에 지붕의 하중을 전달하는 충량(衝樑)이 있고, 충량 위에는 조그마한 우물천장이 있어 지붕의 합각면의 밑을 가리고 있다. 일반적인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닥에는 중앙칸(어칸)에만 마루를 깔았는데, 이는 아래의 홍예에서 올려다 보면 상부의 천장구실을 하게 된다.

화서문의 동쪽으로 약간 떨어진 성벽 위에 전벽돌로 지은 공심돈이라고 하는 시설이 있는데, 지금의 초소와 같은 망루의 역할로 우리나라의 화성에서만 보이는 것이다. 안에는 계단으로 회전하여 계속 올라갈 수 있고, 층마다 바깥으로 향하여 총안(銃眼)과 포혈(砲穴)이 뚫어져 있음, 위에는 단층규모의 팔작목조누각을 만들어 총안이 뚫린 판문시설을 하여 먼 거리의 목포물과 근거리의 목포물을 동시에 방어할 수 있는 시설로 고안하였다. 이러한 공심돈은 궁궐의 궐(闕)의 형태로 망루와 방어의 두가지 기능이 포함된 시설이지만 한양의 신도시로서의 화성의 역할과 정조의 관심이 지대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화서문은 1975년 화성일대의 중수 시에 옹성과 함께 보수되었고, 1993년 번와공사를 하였다.

수원 화성은 1997년 12월 4일 제21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자료출처 : 『문화재대관(보물편·목조, 개정판)』)

[문헌목록]
『문화재대관(보물편·목조, 개정판)』
『문화재안내문안집. 1』
『경기문화재대관-국가지정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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