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지정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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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석남사 영산전
安城 石南寺 靈山殿
한자이름, 종목 및 지정번호, 지정일, 소재지, 시대로 구성된 표입니다.
지정구분 국가지정문화재
종목 및 지정번호 보물 제823호
명칭(한자) 안성 석남사 영산전 (安城 石南寺 靈山殿)
유형분류 유적건조물
지 정 일 1985-01-08
소 재 지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상촌새말길 3-120, 석남사(상중리 508) 지도로 보기
시 대 통일신라

안성 석남사 영산전(安城 石南寺 靈山殿)은 보물 제823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상촌새말길 3-120(상중리 508번지) 석남사 이다.
석남사는 용주사의 말사로 사적기에 의하면 680년(신라 문무왕 20년)에 고승 담화(曇華)가 창건하였으며 나중에 왕실에서 ‘서운산(瑞雲山) 석남사(石南寺)’라는 사찰명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의 사찰의 규모나 모습을 알 수 있는 기록이나 유물이 남아있지 않다. 그 뒤 856년(신라 문성왕 18년) 염거선사(廉居禪師)가 중수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광종으이 아들인 혜거국사(惠居國師)가 953년(고려 광종 5년)에 중수하였다고 하나 당시의 모습은 확인할 수가 없다.

그리고 조선초에는 자복사원(資福寺院)의 하나로 지정될 정도로 규모가 큰 사찰이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사찰전체가 소실되었다고 전해진다. 한동안 폐허였던 석남사는 조선 영조때의 승려인 함월선사(涵月禪師)가 3년에 걸쳐 중수하였다고 하고 영산전과 대웅전의 암막새에 ‘雍正三年乙巳三月日造成(옹정삼년을사삼월일조성)’이라는 명문이 있어 1725년(영조 1년)에 영산전과 대웅전에 번와공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적기는 1940년에 작성한 것으로 보아 이때에 보수공사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1978년 영산전 앞에 위치한 대웅전을 영산전 뒤의 가장 높은 지대에 새로이 터를 조성하여 이건(移建)하였다. 대웅전 이건 이전의 배치를 살펴보면 대웅전을 중심으로 앞으로 2기의 쌍탑이 위치하고 대웅전보다 한단 아래에 중정이 놓였으며 현재의 요사채가 중정을 감싸는 모습을 하고 있다. 영산전은 주불전인 대웅전보다 뒤에 위치하여 부불전으로의 역할을 하였다.

영산전은 팔작지붕의 다포계 건물로 기단은 자연석을 허튼층쌓기방식으로 1단에서 2단을 구성하였고, 바닥은 강회로 마감하였다 자연석의 초석은 그랭이질로 가공된 기둥이 높이는 자리만 평평하게 다듬어 사용하였고, 우주는 평주보다 약간 굵게 만들었다. 기둥머리는 다포계의 법식에 따라 창방으로 결구하고 그 위에 평방이 올려져있다. 평방위에는 공포가 얹혀지는데 매 칸마다 1구의 공포가 사이에 있게 되는 가장 간단한 기법을 하고 있다.

공포는 내외 2출목으로 출목간격이 모두 같은 초기의 다포계 건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바깥쪽 공포의 1, 2제공은 양서형 살미첨차이고 3제공은 3분두형, 4제공은 운공형으로 마감되었다. 안쪽의 경우 바깥쪽과는 달리 1, 2제공은 교두형이고, 3제공은 양봉형으로 되어 있다. 귀공포의 경우 쇠서형으로된 살미첨자와 교두형으로 된 첨차가 혼합되어 있어 간략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창호는 전면 3칸과 우측면 협칸에 설치되어있는데, 전면 3칸에는 2분합문을 두었고, 우측협칸에는 외짝문을 두었다.

가구는 5량집으로 주심도리는 생략되어 없고, 중도리가 매우 적은 특징이 있다. 대들보는 전후면의 평주에 걸리고 종보는 대들도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화반위에 얹혀 져 있는데 단면이 매우 적은 각재를 사용하였다. 서까래는 덧서까래를 사용하여 이중서까래를 만들었는데, 중도리 위에 있는 덧서까래와 상부의 장연과 단연이 만나는 연결지점에 사다리형태의 수직부재로 연결하여 두 서까래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특이한 구조는 전통적인 가구방식이 아니며, 지붕의 하중 등을 경감하기 위한 일본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는 가구법이다. 일제강점기에 보수공사를 한 다른 건축물에서도 이와 같은 구조를 발견할 수가 있는데, 그 예는 청평사 극락전과 화성 장안문, 평양 연광정에서도 볼 수 있다. 또한 처마는 서까래와 부연을 둔 겹처마로 추녀 부근의 결구방식은 선자연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말굽서까래 방식에 가까운 구성을 하였다. 1940년에 일제에 의해 시행된 보수공사로 인하여 지붕의 가구법이 변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천장은 평반자로 구성하였고, 바닥은 장귀틀과 동귀틀을 짜서 청판을 깐 우물마루로 되어 있다. 불단은 중앙과 좌우의 불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중앙불단 위의 닫집은 내외 4출목이나 본 건물에서 보이는 같은 공포수법을 보이고 있다.
건물의 연대를 추정하기에 어려움이 있는 건물이지만 공포가 간략화 되어있고, 양서, 운공, 삼분두의 모습 등으로 중기 다포계로서 대웅전의 중수시기인 1725년보다는 이른 17세기경의 건물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대관(보물편·목조, 개정판)』)

[문헌목록]
『경기문화재대관-국가지정편』
『문화재 안내문안집 2』
『(지도로 보는) 아름다운 경기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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