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지정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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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安城 七長寺 慧炤國師碑
한자이름, 종목 및 지정번호, 지정일, 소재지, 시대로 구성된 표입니다.
지정구분 국가지정문화재
종목 및 지정번호 보물 제488호
명칭(한자)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安城 七長寺 慧炤國師碑)
유형분류 기록유산
지 정 일 1968-12-19
소 재 지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로 399-18, 칠장사 경내(칠장리 764) 지도로 보기
시 대 고려시대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安城 七長寺 慧炤國師碑)는 보물 제488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로 399-18(칠장리 764번지) 칠장사 이다.

고려 전기의 고승 혜소국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다. 현재 원통전 뒤 계곡을 따라서 약 2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혜소국사는 고려(高麗) 광종(光宗) 3년(972) 안성에서 출생하여 10세에 삭발 입산하고 17세 때 칠장사에서 융철(瀜哲)의 가르침을 받았고 통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 뒤 미륵사(彌勒寺)를 거쳐 칠장사로 돌아왔으며 999년 28세에 대사(大師)가 되었다. 덕종(德宗 : 1032-1034)대에는 승통(僧統)이 되어 현황사(玄化寺)에 있기도 하였다. 말년을 칠장사(七長寺)에서 수도하며 이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 1054년 11월 15일에 칠장사에서 83세로 입적하였다. 문종이 절 남쪽 산에 장사를 지내게 하고 시호를 혜소국사라 내렸다. 비석은 입적 후 6년이 지난 1060년에 세웠는데, 비문은 김현(金顯)이 짓고 글씨는 민상제(閔賞濟)가 썼다. 이 비석을 언제 깨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중단이 깨어진 채로 칠장사에 전해 내려왔다. 1975년에 보호각을 지으면서 비석도 같이 수리하였다.

한편, 비석이 깨어진 배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장 가토기요마사가 이 절에 왔는데, 어떤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꾸짖었다. 화가 난 가토가 칼을 빼어 노승의 목을 베었다. 그런데 노승은 사라지고 자신의 팔만 저렸다고 한다. 나중에 비전(碑殿) 앞에 가보니 혜소국사비가 토막나 있었다고 전한다.

이 비석은 귀부, 이수, 비신 등을 모두 갖추었는데 조합되어 있지 않고 따로 보관되어 있다. 귀두는 용머리 형상으로 머리를 치켜들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보습니다. 목이 거의 없어서 등에 붙은 모습이다. 입은 벌리고 이를 드러내고 있으며 수염과 목 지느러미도 묘사하였다. 귀 뒤에는 지느러미가 크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 같은 양식은 고려 전기에 세워진 비석들에서 보이는 공통된 현상 중 하나이다. 등에는 이 중 6각형의 귀갑을 표현하였고 귀갑 주변에는 특이하게도 연주문을 돌렸다. 네 발은 모두 앞으로 향하고 있는데, 발가락의 표현이 형식적이다. 고리는 우측을 향하고 있다. 귀부 중앙에는 직사각형의 비좌가 마련되어 있는데 고려 초기의 비석에 비하여 높이가 현저히 낮다. 상면에는 연화문을 새겼지만 전면과 후면, 양 측면에는 문양이 없다. 전반적으로 귀부는 고려 초기의 석비에 비하여 조각이 얕고 입체감도 떨어진다. 귀두도 용머리보다 괴수(怪獸)의 머리를 연상시키고 있다.

비신은 흑대리석으로 만들었다. 현재 새로 소정한 방형 미좌에 세줘져 있다. 전면 상단에는 제액을 증시혜소국사비명(贈諡慧昭國師碑銘) 8자를 횡으로 새기고 그 밑으로 경계선을 그어 본문을 새겼다. 비신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측면에 조각을 한 것이다.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가운데 두고 서로 엉켜있는 형태를 비교적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이는 비문에 대한 보호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수는 구름 위를 날고 있는 용을 조각하였다. 환조에 가까울 정도로 깊게 조각하고 입체감도 있어서 귀부에 비하여 훨씬 세련된 조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전 시기의 비석에 비하여 간략화된 모습이다. 상면에는 따로 용 한 마리 더 조각하고 그 위로 연화문이 조각된 원판형 석재를 올려놓았으나 원래 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비석은 신라 말 고려 초 석비의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고려화한 석비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비신의 측면에 새겨진 용과 이수의 형태는 아주 독특한 것이다. 이 비석의 이수와 형태가 유사한 것으로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세부적인 양식에서는 차이가 많다. 또한 이수가 비신에 비하여 너무 커서 전체 비례가 맞지 않고 안정감도 떨어진다. 비신이 깨져나간 것도 이와 관계있지 않은가 한다.
비석은 현재 보호각 속에 귀부, 비신, 이수 등을 각각 따로 분리하여 세워놓았다. 이수가 무거워 비신에 올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보호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1975년에 세워졌다.

(자료출처 : 『문화재대관(보물편·석조2, 개정판)』)

[문헌목록]
『경기문화재총람-국가지정편(1~3)』
『(국보·보물) 문화유산을 찾아서-경기도, 인천광역시』
『문화재안내문안집.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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