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지정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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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은대리성
漣川 隱垈里城
한자이름, 종목 및 지정번호, 지정일, 소재지, 시대로 구성된 표입니다.
지정구분 국가지정문화재
종목 및 지정번호 사적 제469호
명칭(한자) 연천 은대리성 (漣川 隱垈里城)
유형분류 유적건조물
지 정 일 2006-01-02
소 재 지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은대리 577 등 지도로 보기
시 대 삼국시대

연천 은대리성(漣川 隱垈里城)은 사적 제469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은대리 577번지 일대이다.

은대리성은 연천군 전곡읍 은대리 일대의 한탄강변에 위치한다. 전곡읍에서 왕징면으로 통하는 372번 지방도를 따라 진행하면 전곡리 선사유적지로 이어 지는 갈림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500m가량 남쪽으로 내려오면 우측에 연천군 의료원이 있고 의료원 뒤편에 은대리성이 있다. 은대리성에 관한 기록은 조선시대 자료에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일제강점기시대 조사보고서에도 확인되지 않는다. 은대리성의 존재를 최초로 보고한 것은 1995년 연천군에서 발간한 『향토사료집』이며, 이후 육군박물관에 의한 지표조사에서 상세한 내용이 소개되었다.

2003년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에 의한 시굴과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성벽의 구조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은대리성이 있는 곳은 차탄천이 한탄강에 합류하는 지점으로 성은 두 하천에 의해 형성된 삼각형의 침식대지 위에 축조되어 있다. 유적을 감싸고 남서향하는 한탄강은 곧 임진강에 합류하고, 서울과 원산을 잇는 교통로로 활용되어 왔던 추가령구조곡에 접하여 있다. 따라서 이곳은 한반도의 중부지역과 동해안지역을 최단거리로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추가령구조곡을 이용한 말갈족의 침입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던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유적에 대한 발굴은 성 내부의 유구확인을 위한 시굴조사와 동벽에 대한 단면 확인 조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조사결과 동쪽과 북쪽 성벽의 상당부분이 훼손되었으나 내부의 보존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조사결과 성의 평면은 삼각형으로 남벽과 북벽 일부는 강변의 자연 단애를 이용하였으며 동쪽평탄지에는 지상성벽을 구축하였다. 동벽은 외성과 내성의 이중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외성의 전체 규모는 동서 400m, 남북 145m로 총 둘레가 1,069m이며 면적은 32,592㎡이다. 이 중에서 내성은 둘레가 총 230m이며 내부면적은 2,770㎡이다.

은대리성의 성벽은 호로고루나 당포성에 비하여 성벽의 높이도 낮고, 견고함도 떨어지지만 기본적인 성벽의 구조는 거의 동일하다. 발굴조사에서 노출된 성벽의 단면을 보면 성벽의 기저부와 중간부분은 점토모래로 판축을 하였고 성의 외벽과 내벽만 석축을 한 구조이다. 이런 형태의 축성방법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과 평양의 대성산성에서도 확인되는 고구려의 특징적인 축성기법으로서 축성이 용이한 토성의 장점과 방어력과 유지관리의 효율성이 높은 석성의 장점을 결합한 형태이다. 이처럼 은대리성의 축성기법이 호로고루나 당포성과 기본적으로 유사하지만 차이점은 동벽의 외벽에 보축성벽을 쌓지 않았다는 것과, 성벽의 높이가 높지 않지만 남벽과 북벽에도 동일한 구조로 지상성벽을 쌓았다는 점이다.

또한 호로고루와 당포성은 7세기 후반 신라에 의한 점유 및 동벽 바깥에 석축성벽을 덧붙여 쌓은 흔적이 확인되지만 은대리성은 후대 사용 흔적이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이후에 폐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동벽의 내벽부분에서는 성벽 축조를 위한 비계목을 설치했던 기둥흔적과 빗물의 배수처리를 위한 시설이 확인되었는데 구(溝)의 규모는 동서 폭 2m·깊이 30㎝이고 잔존상태로 보아 동벽과 동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문터 3개소를 비롯하여 대형 건물터 1개소, 치성 3개소가 확인되었다. 문터는 북벽과 남벽의 비교적 지형이 낮은 곳에서 확인되었는데, 북벽에 있는 2개의 성문의 경우 배수기능도 겸했을 것으로 보인다. 건물터는 남벽에 인접한 외성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건물의 외곽담장 축조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석재가 사방에 3m 폭으로 무너져 있다. 담장의 내부 공간은 동서 60m, 남북 30m 정도로 대규모 건물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치성은 성의 북동 회절부와 북문터 서쪽 및 남문터 서쪽에서 확인되었다. 북문터와 남문터 서쪽 치성은 8×5m의 동일한 규모로 체성에서‘ㄷ’자 형태로 돌출시켜 성문의 방어력을 높였다. 이처럼 성문 주변에 방형 치성을 설치하는 구조는 고구려산성의 특징이기도 하다.

출토유물은 대부분 토기편이며 소량의 철제 유물이 출토되었다. 토기편은 크게 백제토기와 고구려토기로 크게 구별되는데 95% 이상이 고구려 토기이다. 백제토기는 대부분 파편으로 출토되었으며 대옹편과 승문이 타날된 호형토기편이 주류를 이룬다.
은대리성에서 확인된 토기 중 완형복원이 가능한 토기는 검은색을 띠고 있으며 두개의 가로 날 손잡이가 달리고 외반된 구연에 평저의 바닥을 갖춘 전형적인 고구려토기 항아리이다. 특이한 것은 토기의 어깨면에 음각 물결무늬와 점열문이 찍혀 있다. 이러한 문양 형태는 다른 토기편에서도 일반적으로 확인되는데, 인접한 고성산 보루와 호로고루 목책단계, 몽촌토성 등에서 확인되는 유형과 유사한 것으로 비교적 이른 시기 고구려토기에 해당한다.

은대리성은 고구려군의 남진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성 내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양상을 고려할 때 6세기 중엽 고구려가 신라와 백제의 연합군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긴 이후 임진강 유역으로 후퇴를 하였고 임진강 유역을 따라 새로운 국경이 형성되었다. 이때 한탄강변에 있었던 은대리성은 더 이상 고구려의 성이 아니라 신라의 영역에 속하게되었으며 이후 전략적 가치의 상실로 인하여 폐성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은대리성은 호로고루·당포성과 함께 사적으로 지정되고 정비보존계획이 수립되어 정비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동벽은 복토하여 잔디를 식재하고 성 내부와 외부의 잡목을 제거하는 한편 성내부를 동서로 관통하는 탐방로 설치 및 서쪽 끝부분에 전망용 데크설치가 추진되고 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대관 사적 제2권(증보판)』)

[문헌목록]
『연천 은대리성 축조공법과 성격 고찰』
『고구려 유적의 보고 경기도』
『경기도의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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