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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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각
五旌閣
한자이름, 종목 및 지정번호, 지정일, 소재지, 시대로 구성된 표입니다.
지정구분 도지정문화재
종목 및 지정번호 경기도문화재자료 제7호
명칭(한자) 오정각 (五旌閣)
유형분류 유적건조물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 29번지 지도로 보기
시 대 조선시대

오정각(五旌閣)은 경기도문화재자료 제7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오정각길 35(화정동 29번지)이다.

조선 세조(世祖) 때 단종(端宗) 복위 운동에 가담했던 이조판서(吏曹判書) 김문기(金文起 : 1399~1456)와 아들 현석(玄錫)에 대한 충신 정문(旌門)과 손자 충주(忠柱), 중손 경남(景南), 현손 약전(約前)등에 대한 효자 정문 등 5대에 걸친 정문을 한데 봉안한 곳이다.
마을에 들어서면 왼쪽 산기슭에 오정각이 있고, 마을 오른쪽 골짜기로 조금 올라가서 고송정이 있다. 오정각 입구에는 1983년에 세운 ‘오정각중수기념비(五旌閣重修記念碑)’가 있는데, 비신의 전면에는 ‘五旌閣重修記念碑’라 새기고 뒷면과 양쪽 측면에는 김문기 등 5대의 행적, 관직, 덕망 등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단칸 맞배지붕 대문을 들어서면 전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의 정각이 있는데 전면 1칸은 퇴칸으로 구성하였다. 가운데 칸의 처마 밑에는 ‘오정각’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한 칸 안쪽으로 들어가 다시 ‘오세충효(五世忠孝)’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내부에는 정면 가운데 칸에 김문기의 영정이 걸려 있고, 후면 벽쪽에 김문기의 정문을 중심으로 5대 정문이 서 있다.
현재의 건물은 고종(高宗) 7년(1870)에 건립되었다고 하며, 1968년 보수, 1976년 단청을 거쳐 1981년에 시흥군에서 정화 사업을 실시하였다. 공포는 전면에 초익공(初翼工), 후면에 이익공(二翼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양식으로 보아 후면의 것이 중수 이전의 모습으로 생각된다.


(자료출처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 경기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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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경기문화포털

정문(旌門)

충신 효자 열녀 등 모범이 되는 사람을 표창하기 위해 그 사람이 사는 마을 입구나 집 문 앞에 세우던 붉은 문으로 작계(綽械) 또는 홍문(紅門), 홍살문이라 한다. 표창하는 종류을 알리는 ‘忠 孝 烈’ 등의 글자를 새기고 그의 이름이나 직함을 넣었다.

충신 김문기와 후손들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 너빌마을에 자리 잡은 오정각(五旌閣)은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와 아들 김현석(金炫錫)의 충신 정문(旌 門)과, 손자인 김충주(金忠柱), 증손 자 김경남(金景南), 4대손 김약전 (金約前) 세 사람의 효자 정문이 모셔진 곳이다. 김문기는 단종복위계 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모두 주살(誅 殺)당할 때 이 사건에 관련되어 군기감 앞에서 처형되었다. 영조 때 복관되고 1778년(정조 2)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단종복위운동의 실패로 김문기와 그의 아들 현석이 죽고, 현석의 아들 충주와 충립(忠立)은 노비로 전락하였다. 김충주는 형 충립에게 “형제가 모두 노비가 되었으나 앞으로의 생사를 알 수 없습니다. 후손에게 어찌 의롭지 않음을 남길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까. 아니면 도망하여 부조(父祖)의 뒤를 잇는 것이 낫겠습니까?”하였다. 이에 그들은 이름을 고치고 잠적하였다가 안산 광곡리(廣谷里; 현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 너빌마을)에 이르러 은거하였다. 풀을 엮어 집을 짓고 숯을 파는 것을 업(業)으로 삼았으며, 스스로 아호를 ‘탄옹(炭翁)’ 이라 하였다. 평생 고기와 술을 먹지 않고 마의(麻衣)에 평립(平笠)을 쓰고 다녔다. 집 뒤에 큰 바위가 있고 그 아래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있었는데 평상시에 소나무에 의지해 마음을 달랬고, 단종에 대한 충성심이 변 할 때마다 바위에 올라 단종의 묘가 있는 영월(寧越)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였다.

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비명에 숨진 것을 몹시 슬퍼하여 아침저녁으로 소나무 곁에서 눈 물을 흘리자 이에 소나무도 말라 죽었다. 후에 그의 9세손 김처일(金處一)이 그 자리에 ‘고송정(枯松亭)’이란 정자를 지었고 그 바위를‘망월암(望越岩)’ 이라 하였다.

충성심이 효심으로

김충주의 아들인 김경남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버섯국을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해 집 뒷전 마하산의 비탈에 군생(群生)하는 버섯을 자주 채취하여 국을 끓여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가 보니 버섯 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에 눈물을 흘리면서 “내 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라고 탄식하였고, 그날 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버섯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를 기이하게 여겨 그곳을 ‘버섯들’ 이라고 불렀으며 그 버섯을 ‘효자버섯’이라 하였다. 또 버섯이 났던 곳에 기념비를 세웠다. 지금도 ‘균원(菌苑)’이라는 각자(刻字)가 또렷이 남아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여막을 짓고 3년을 한결같이 시묘하였다.

김경남의 아들인 약전은 아버지가 병이 나자 매일 종기를 빨아내며 호전되기를 하늘에 기원하였다. 아버지의 변을 맛보아 병세를 살피는 지극한 효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에 아버지의 병이 차도가 있어 회복 되었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마을 사람들이 모두 피난하려 하자 “도망가서 살기를 꾀하기보다 어려움에 처하여 이롭게 죽는 것이 마땅 하다.”고 설득하였다. 며칠 후 왜병이 마을에 들어왔는데 100세가 넘은 부친을 모시고 있는 김약전의 효성에 감동하여 왜병이 사죄하고 물러갔다 한다. 이로써 마을 이름을 성지골[姓支谷]이라 하고, 김약전은 자 신의 호를 성지당(姓支堂)이라 하였다. 후에 병자호란을 당해서도 청나라 군사들이 이곳이 효자마을이라는 말을 듣고 노략질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1851년 경기도 안산의 유생들과 김녕 김씨 후손들이 세덕사(世德詞)를 세웠는데, 1870년(고종 7) 김문기 부자의 충신과 김충주와 3대에 걸 친 효자에게 왕명으로 정려(旌閭)가 내려지자 세덕사에 오정각을 세웠다. 1968년 보수하였고 1976년 단청을 하였으며 1981년 정화 사업을 실시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정각 중수비는 1983년에 세워진 것이다.
[문헌목록]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3)』
『안산시사』
『(경기도 역사와 문화) 백문백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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