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지정 문화재

스크랩하기
인쇄하기
즐겨찾기
퍼가기
카카오톡으로 퍼가기 페이스북으로 퍼가기
정발장군묘
鄭撥將軍墓
한자이름, 종목 및 지정번호, 지정일, 소재지, 시대로 구성된 표입니다.
지정구분 도지정문화재
종목 및 지정번호 경기도기념물 제51호
명칭(한자) 정발장군묘 (鄭撥將軍墓)
유형분류 유적건조물
지 정 일 1979-09-03
소 재 지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백석리 산34 지도로 보기
시 대 조선시대

정발장군묘(鄭撥將軍墓)는 경기도기념물 제51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백석리 산34번지 이다.

조선 중기의 무신 백운(白雲) 정발(1553∼1592) 장군의 묘이다. 선조 12년(1579)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고 그 후 계속 벼슬에 올라 군비를 정비하고 병사를 훈련시키는데 힘썼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부산에 침입한 왜군을 맞아 용감히 싸웠으나 성이 함락되고 장군도 전사하였다. 장군의 시신은 찾지 못하였으나 그가 타고 다니던 말이 투구와 갑옷을 물고 와서 그것으로 장례를 치렀다고 하며, 죽은 후에 좌찬성의 벼슬에 올랐다.

정발장군묘는 미산면 백석리에 위치한 경주정씨 제실의 서북쪽 소로를 따라 250m 정도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해발 150m가량의 9부 능선에 동향(東向)하여 위치한다. 묘는 부인 풍천 임씨(豊川任氏)와의 합장묘이며, 봉분은 원형으로 기저부에 높이 40㎝의 백색화강암 호석 20매를 둘렀다. 규모는 직경 394㎝, 높이 150㎝이다. 여러 석물이 있었으나 훼손되고 현재 새로 건립한 상석과 향로석, 무인석, 망주석 등이 있다. 비문은 송시열이 지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고, 1982년 다시 비를 세웠다. 한편 정발의 묘역 아래에는 4기의 비가 세워져 있는데, 묘역 입구 우측에는 충노용월사적비(忠奴龍月事蹟碑)와 의마총비(義馬塚碑)가 있고, 좌측에는 열첩애향정려사적비(烈妾愛香旌閭事蹟碑)와 양경공묘소사적비(良景公墓所事蹟碑)가 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연천군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내용 더보기
※ 아래내용 출처 : 경기문화포털

임진왜란 때 부산에서 전사한 정발 장군의 무덤이 왜 연천에 있나?

“나는 마땅히 이 성의 귀신이 될 것이다. 떠나고 싶은 자가 있거든 떠나라”라고 하며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맞선 첫 전투, 부산진성에서 결연한 의지로써 끝내 살신분전(殺身奮戰)한 정발 장군. 그는 조선 장수의 기개를 보여준 것만이 아니라, 실제 전세의 흐름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훗날 왜적도 ‘우리는 부산에서 크게 좌절되었다’, ‘흑의장군이 가장 두려웠다’, ‘부산을 함락시킨 뒤로는 감히 우리 군대를 대적할 만한 군대가 없었다’라고 평가할 정도로 부산진 전투는 임진왜란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였다. 경기도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정발 장군의 묘는 그의 출생지이며 경주 정씨의 집성촌이었던 연천군 미산면 백석리에 위치하고 있다.

정발(鄭撥, 1553∼1592) 장군은 경주가 본관으로 장군의 집안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이름을 얻은 명문 가문이었다. 25세 때인 1577년(선조 10)에 무과에 응시하여 선전관에 제수된 이후 승진을 거듭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두 해 전에 부산진첨절제사(釜山鎭僉節制使)에 제수되었다. 당시는 왜적 침입에 대한 기미가 있었고 게다가 바로 그 관문이 되는 부산진의 첨사가 된다는 것은 그 누구도 원치 않는 일이었다. 부임에 앞서 장군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이라도 하듯 어머니에게 하직하며 눈물로 말하였다. “소자가 벼슬을 구한 것은 본래 어버이를 봉 양하고자 한 것이었으나 이미 임금의 신하가 되었으니, 또 마땅히 나라를 위해 죽을 것입니다. 충효는 두 가지를 온전히 다할 수 없으니 원컨대 어머니께서는 소자를 염두에 두지 마옵소서.” 무릎을 꿇고 하직인사를 하며 부인에게 어머니를 당부하고 임지로 떠났다.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선발대가 부산의 절영도 앞바다에 선단을 드러내고 정발 장군이 이에 응전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왜선 출현의 첩보를 받은 정발 장군은 즉각 전함 3척을 이끌고 바다로 나아갔다. 그러나 바다를 빽빽이 메운 일본 군선은 겨우 3척의 군선으로 대적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왜군의 공격은 이튿날 4월 14일 새벽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정발 장군은 검은 갑옷을 입고 노도와 같이 밀어닥친 수만의 적군을 맞아 분전을 거듭하였다.

한편 성안의 군·관·민은 장군의 충의에 격발되어 죽음을 무릅쓰고 항전하였다. 결국 장군은 중과부적으로 탄환을 맞아 전사하고 성도 함락 되었다. 이에 그의 애첩 애향(愛香)은 장군을 따라 자결하였고, 노비 용월(龍月) 또한 분함을 참지 못하고 적에게 달려들었다가 죽음을 맞이하였다. 성안의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살아남은 자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전투는 오랫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고 훗날 살아남은 몇 명과 공격에 참가했던 왜적의 입을 통해서, 그리고 당시 왜군에 종군했던 선교사들의 기록을 통해서 알려졌다.

전투가 끝나고 장군의 시신 은 찾지 못하여 장군의 애마(愛馬)가 물고 온 갑옷과 투구로 의관장(衣冠葬)을 치렀다고 한다. 정발 장군 묘는 부인 풍천 임씨(風川任氏)와의 합장묘로 송시열이 지은 묘표가 있었다고 하나 소실되었고, 현재는 1982년 후손들에 의해 다시 세운 비 와 상석 등 석물들이 놓여 있다. 묘역입구에는 양경공사적비를 비롯하여 임진왜란 당시 함께 순절한 열첩(烈妾) 애향과 충노(忠奴) 용월을 기리는 사적비와 의마총비(義馬塚碑) 등이 있다. 임진왜란 이후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추숭사업이 진행되었는데, 특히 장군의 고향인 연천에는 1741년(영조 17)에 애첩 애향의 정려비가, 그리고 1767년(영조 43)에는 장군의 사당에 부조묘가 세워졌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모두 전소되었고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정발 장군 묘가 위치하는 백석리 및 광동리 일대는 경주 정씨 집성촌으로 6·25전쟁 전까지만 하더라도 종갓집을 비롯해 12가구가 살고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민가 두어 채 정도만 남아있다. 정발 장군 후손들에 의하면 음력 4월 14일을 기해 종가를 중심으로 매년 장군의 제사를 지내왔고, 그 때는 종가 외에도 동네사람 모두가 모이곤 했었다고 한다. 현재도 종중에 의해 장군의 제례가 봉행되고 있다.
[문헌목록]
『문화재 안내문안집 2』
『(경기도 역사와 문화)백문백답』
『연천의 맥』
※ 문화재를 보고 묘사하는 단어, 떠오르는 인상이나 느낌 등을 한 두 단어로 입력해보세요.
※ 여러분과 같거나 다른 생각들을 확인해보세요.
이전 다음 국가지정 문화재
공공누리 제4유형: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경기문화재단이 보유한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작품 사진의 경우 작품저작권자의 권리에 의해 보호를 받기 때문에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으니 문의 후 이용 바랍니다.

콘텐츠 정보에 만족하십니까?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