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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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계남장군고루비
洪季男將軍古壘碑
한자이름, 종목 및 지정번호, 지정일, 소재지, 시대로 구성된 표입니다.
지정구분 도지정문화재
종목 및 지정번호 경기도유형문화재 제71호
명칭(한자) 홍계남장군고루비 (洪季男將軍古壘碑)
유형분류 기록유산
지 정 일 1977-10-13
소 재 지 경기도 안성시 미양면 구수리 산87-1번지 지도로 보기
시 대 조선시대

홍계남장군고루비(洪季男將軍古壘碑)는 경기도유형문화재 제71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안성시 미양면 구수리 산87-1번지이다.

임진왜란(1592~1598) 때의 명장 홍계남(洪季男, 1564~1597)을 기리기 위해 안성 군민(軍民)이 세운 비로, 그가 쌓은 진지였던 목촌(木村)의 야산 중턱에 세운 비각에 전한다. 비문은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 이재(李縡 : 1680~1746)가 짓고 민우수(閔遇洙 : 1694~1756)가 썼으며 유척기(兪拓基 : 1691~1767)가 두전(頭篆)을 썼다.

천성이 근엄하고 용감했던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 : 1538~1601) · 신립(申砬 : 1546~1592)의 막하에서 활동하다 고향 안성으로 돌아와 부친 홍자수(洪自修 : ?~1592)와 네 형과 함께 의병을 모았다. 그리하여 엽돈령에 진을 쳤던 왜적을 물리치고 목촌에 성루를 쌓는 한편, 죽산 · 양지 · 용인 등에 진치고 있던 왜적을 기습하여 전승을 올렸다. 조정에서 그의 공로를 가상히 여겨 수원판관(水原判官) 겸 기호양도조방장(畿湖兩道助防將)을 제수했다. 뒤에 영천군수(永川君守) 겸 경상도조방장 재임시에는 안강현에 들어온 왜적을 추격하여 포로 5천여 명을 구하기도 했다. 34살의 나이로 사망하자 선조(宣祖)는 그의 충절을 기려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고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추증했다.

(자료출처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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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안성시청

홍계남(洪季男)

조선시대 무신이며 의병장으로 본관은 남양이다. 우찬성 자수의 아들로 서운면 양촌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단정하고 위용과 용력이 뛰어나 무술에도 특출하였고 높은 것을 뛰어 넘는 재주가 있어 홍나비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순변사 이일의 휘하로 상주에서 신립장군과 합세하여 충주탄금대에서 혈전을 벌였으나 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의병을 규합하여 목촌에서 성을 쌓고 왜군과 대치하였다.
죽주성에서 적군은 그를 사로잡고자 부친의 시신을 성 밖에 달아 놓고 유인작전을 펼쳤다.
그는 적을 처단하고 부친의 시신을 무사하게 가져와 진중에 안치시켰다. 이같은 공으로 장군은 당상관으로 특진되었고 수원판관겸 기호양도조방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절충장군 칭호를 하사받았다.

선조 29년 이몽학이 난을 일으켜 홍계남이 자기 편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하옥되어 많은 고초를 당했으나 무고함이 밝혀져 석방,복직되었다. 이듬해 34세를 일기로 영천에서 사망하였다. 선조는 그의 부음을 듣고 처자와 노모의 부양을 적극지원하도록 하는 한편 이조판서에 추증했다. 그리고 그의 충효를 널리 후세에 전하고자 <삼강행실도>에 속기토록 했다.
[문헌목록]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안성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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